얼마 전 심평원 개인정보보호 자율점검 서비스를 신청하여 받아보았다. 심평원 직원 두 명이 나와 점검하는 서비스인데 자리에 앉기도 전에, “기관 하나 운영하기 너무 복잡하시죠” 하며 미리 위로의 말을 꺼낸다.

항상 느끼는 바이지만 쓸데없는 행정 규제 때문에 쏟는 인력 에너지 시간이 참 아깝다. 작은 업장 하나 운영하는데 필요한 그 어마어마한 서류더미들을 생각하면 기업들이 이 땅을 떠나는 이유가 있다면 이런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총 49개 항목을 점검하는데, 자율점검 후 혹시라도 행자부 공무원들이 실사(나올 일도 없겠지만, 그래도) 나오면 가차 없으니 본인들도 정확히 점검하지 않으면 징계 대상이라고 한다. ‘방금 전에 시정사항만 고치고 업로드 하면 실사 면제라고 했으면서’ 라고 원망하고 싶었지만, 그들에게도 징계에 징계라니 현장에 나온 공무원들에게 뭐라 할 일은 아닌 듯 싶었다.

CCTV 관리를 어플리케이션으로 하는데 누가 관리하는지 비밀번호 설정은 되어 있는지 확인하고, 개인정보보호에 관한 내용을 원내에 게시해야 하는데 고시가 바뀌면 바뀐 후의 내용만 게시하면 안 되고 전·후 변경 내용을 같이 게시해야 한다고 한다. 차트 보관장 시건장치 있는 건 좋은데 보관공간에 드나드는 사람 출입기록대장을 만들어야 한다길래 하루에도 수십 번을 드나드는데 그걸 일일이 다 수기로 대장을 적으라는 거냐고 물으니 그러라고 한다. 그래도 보안 때문에 앞으로도 전자차트 절대 안 쓰고 싶은지라 어지간히 귀찮겠다 싶다.

종이차트는 정확히 10년에서 하루가 지나면, 책처럼 두꺼운 차트에서 한 장씩 파쇄기에 넣어 파쇄 중인데 파쇄 대장 기록을 보여달라 하여 제출하였다. 10년을 보관하지 않아도 처벌받고 10년에서 하루만 지나도 처벌받고 참 힘들다.

개인정보가 누출되지 않도록 파쇄를 잘 해서 버린다는 증명을 하라기에 “파쇄기 안 되는 날은 진료기록부 종이 뜯어서 그냥 제가 먹어요”라고 농담했더니 다들 웃음이 터지는 모양.

PC에 따로 보관한 개인정보자료나 usb(는 불법이라고 합니다) 이런 건 없으냐고 묻는 항목이 있어, [따로 보관하는 행위는 한 적 없다]하니 그걸 증명하라고 한다. 그래서 어떤 자료나 증거의 존재를 있다, 없다로 증명할 수는 있어도 자료의 부재가 진실이냐 아니냐는 증명할 방법이 있냐고 되묻고, 이번엔 다 같이 크게 웃어 버렸다.

사실 이쯤 되면 속으로는 ‘막가자는 거죠?’라는 되뇌임과 함께 이토록 겹겹이 쳐진 관치의 굴레라는 생각에 머리가 아프다. 개인적으로 우리 민족 최대 암흑의 역사라 생각하는 조선 500년 사농공상의 그 거대한 헤게모니의 그늘이, 수 백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드리우고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퇴근하고 문득 10여 년 전에 읽었던 오쿠다히데오의 장편소설 [남쪽으로 튀어]가 생각나 오랜만에 책을 집어 들었다. 소설의 내용은 국가나 단체를 혐오하는 대담한 성격의 아버지 덕분에 온 가족이 오키나와로 불쑥 이사를 가며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그린 것인데, 이즘과 그 실천의 괴리 혹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빚어지는 인간적 비애감을 즐거운 에너지로 승화시킨 감동 깊은 유쾌한 작품이다. 오래 전 읽은 이야기라 그 결말이 생각나지 않아 다시 읽어볼 요량으로 책장을 넘긴다. “국민연금을 낼 수 없어! 국민연금을 내야한다면 난 국민을 관두겠어!” 라고 외치는 글 속의 주인공을 잠시 떠올리며 나도 동시에 귀여운 아나키즘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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