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 집착, 혹은 생존. ‘우상(偶像)’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간에 사람들은 누구나 저마다의 우상을 가지고 살아간다. 원치 않는 상황에 휩쓸려 이들이 충돌했을 때 그 파장은 사람, 혹은 사회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영화 <우상>은 교통사고로 얽힌 세 인물을 통해 관객에게 우상을 넘어선 진정한 ‘가치’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영화는 집단 성폭행 피해자를 주인공으로 한 <한공주>(2014)를 연출, 평단과 관객에 고른 호평을 받았던 이수진 감독의 작품이다. 사건 이후에 세상 속으로 들어가려는 피해자와 그를 보듬어주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담담한 시선으로 성공적인 장편 데뷔를 마친 감독은, 16년 전부터 <우상>을 구상했다. “한국 사회의 크고 작은 사건을 접하며 그 시작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시스템이 내포한 문제 속에서 인간의 꿈과 신념이 맹목적으로 변하는 순간, 그것이 우상이 아닐까 생각했다”라고 밝힌 그는, 영화 속 인물의 선택에 초점을 맞추어 우직하게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뺑소니 사고를 은폐한 아들 때문에 정치 인생에 위기를 맞은 구명회(한석규), 그 사고로 삶의 전부와도 같았던 아들을 잃은 유중식(설경구),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는 최련화(천우희). 이 세 인물의 얽히고설킨 이야기는 스릴러 장르 아래에서 파급력을 발휘한다. 사건 중심이 아닌 인물 중심의 전개로, 전형적인 스릴러를 기대했던 관객에게는 다소 낯설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대신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관객을 지루할 틈 없이 밀어붙인다. 최근 대두된 한국영화의 위기론 속에서 제 몫을 충실히 하는 작품의 탄생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여기에 한석규, 설경구, 천우희 이 세 배우의 연기만으로도 볼 가치가 충분하다.

부족할 것 없는 구명회와 달리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는 유중식 역은 수식어가 필요 없는 배우 설경구의 몫이었다. <박하사탕>에서부터 ‘시대’와 ‘서민’의 얼굴이 된 설경구는, 이번 영화에서 정신지체장애 아들을 잃고 사건의 단서를 찾기 위해 집착하는 인물을 연기한다. 그는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출연을 결심했을 만큼 가슴을 울린 작품”이라고 말했다.

유중식이 평면적인 인물에 가깝다면 구명회는 입체적인 인물이다. 매 작품 한계를 벗어나, 이제 연기의 정점에 오른 듯한 한석규의 또 다른 도전이다. 표정만으로 선과 악을 오가는 캐릭터를 능수능란하게 표현한다. 한석규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비겁한 쪽으로 폭주하는 인물을 연기해보고 싶었는데, 구명회가 그랬다”라고 밝혔다.

<한공주> 이후 이수진 감독과 조우한 천우희 역시 많지 않은 분량에도 폭발적인 에너지를 발휘한다. 사건의 열쇠를 쥔 최련화는 각기 다른 목적을 가진 구명회와 유중식에게 쫓기며 오직 생존을 위해 분투한다. 천우희는 최련화를 연기하기 위해 중국어와 조선족 말투를 배워가며 캐릭터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영화의 미장센은 각자의 우상을 좇는 인물 간의 관계를 명확히 보여준다. 이는 감독의 의도였는데, 제작진을 이를 위해 포토리얼리즘(사물을 사진처럼 정확하게 묘사하는 예술기법)에 접근해 영화의 공간을 그려냈다. 권력을 좇아 스스로 우상이 되고자 하는 구명회의 집은 온전히 수직적인 구조로 디자인됐으며, 돈이나 명예와는 동떨어진 채 아들만을 바라보는 유중식의 집은 평면적 구조로 전혀 다른 인상을 준다. 감독은 중식의 집이 지체장애인 아들 ‘부남’을 고려한 구조로 디자인되길 원했다. 이를 위해 제작진은 중식의 일터인 철물점과 집 사이에 마당을 놓고, 로케이션과 세트 제작을 오가며 중식의 집을 완성했다.

영화는 제69회 베를린 국제영화제 파노라마 섹션에 공식 초청됐다. 파노라마 섹션에는 예술성과 대중성이 조화를 이룬 우수작이나, 그해 가장 주목할 만한 감독의 작품을 선정한다.

3월 20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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