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대필 편지 작가다. 의뢰인이 보낸 사진 몇 장과 사연으로 수십장의 편지를 쓰면서도 정작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데에는 서툴기 짝이 없다. 그런 그는 어느 날 ‘당신에게 귀 기울여주고 이해해줄 존재’라는 문구에 이끌려 인공지능 운영체제 OS1을 구입한다. OS1은 남자에게 자신을 ‘사만다’라고 소개하며 그의 마음을 파고든다.

영화 <그녀>는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진 한 남자의 이야기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현실에서의 관계가 어려워 비현실 속으로 도피한 남자의 이야기다. 주인공 테오도르는 결혼에 실패한 이후 새로운 관계를 맺는 일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런 그에게 사만다는 사람보다 더 완벽한 존재다. 비서처럼 스케줄을 알려주고, 고민을 들어주며, 잔소리 따위는 하지 않는다.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진화하도록 만들어진 프로그램이지만, 테오도르는 사만다와의 진짜 사랑이 가능하다고 착각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현실로 되돌려놓는 것 또한 사만다다. 사만다가 OS1 사용자 모두의 소유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테오도르는 비로소 과거에서 벗어나 타인에게 진심을 털어놓을 수 있게 된다.

영화는 SF로맨스를 표방하고 있으나, 가장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사랑에 관해 이야기한다. 미래 사회에서도 누군가와 진정으로 관계를 맺는 건 눈을 맞추고 거짓 없이 대화하는 과정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 말이다. “올해 가장 독창적인 로맨스”(뉴욕 매거진), “영혼을 성장시키는 영화”(피플) 등 해외 유수 언론의 찬사를 끌어낸 건 감독 스파이크 존즈가 직접 쓴 시나리오의 공이 컸다. 인간과 인공지능의 사랑을 넘어 최첨단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외로움을 통찰하는 이야기는 제71회 골든글로브 각본상, 제86회 아카데미 각본상 수상으로 이어졌다.

<앙코르>, <마스터> 등에서 폭발적인 연기를 보여준 호아킨 피닉스는 주인공의 섬세한 감정변화를 정확히 읽어내, 어떤 캐릭터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음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여기에 스칼렛 요한슨은 목소리만으로 사만다를 더할 나위 없이 연기하여 이야기에 설득력을 더했다. 극 중 유일하게 테오도르를 이해하는 친구 에이미 역의 에이미 아담스, 전 부인 캐서린 역의 루니 마라 등 조연들의 호연도 영화의 완성도를 높였다. 한편의 뮤직비디오를 보는 듯한 영상미도 관전 포인트다.

5월 29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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