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재헌 | 288쪽 | 값 15,000원 | 삼인

4월 21일, 선임 선생님과 함께 아침 회진을 돌며 환자들을 인계 받았다. 병상에 담요를 덮고 앉아 있는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열일곱 살이었고, 수줍은 미소가 담긴 인사를 건넸다. ‘크게 다친 환자는 아닌가 보다’라고 생각하는 사이에 선임 선생님이 진찰을 위해 담요를 걷어 올렸다. 나도 모르게 눈이 커졌다. 열일곱이라는데 배가 부풀어 올라 있었다. 만삭이었다. 그리고 두 다리가 모두 절단돼 있었다. 하나는 무릎 아래, 하나는 무릎 위에서 잘렸다. 안타까운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한국에 있었다면 대학에 가는 문제나 교우 관계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나이에, 그녀는 두 다리가 없는 산모가 될 처지였다. 다른 세상을 살아가야 했다. 그런데 엄마가 될 준비를 하는 그녀가 조용히 건넨 말에는 엄청난 비극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씩씩함이 묻어 있었다. “두 다리가 없어졌지만 저하고 제 아이가 살았어요.” 이 말을 어떻게 받아야 할지, 그녀의 여려 보이는 미소에는 성숙한 강인함이 묻어 있었고, 그런 모습 앞에서 나는 오히려 으레 하는 평범한 격려의 말조차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그냥 어색하게 미소만 지어 보였다. _ 본문 중에서

저자는 의대 재학 시절부터 국경없는의사회에서 활동하기를 꿈꿨고, 2009년 탄자니아에서부터 이를 실행에 옮겼다. 2013년에는 필리핀 태풍 하이옌 구호 현장, 2014년 캄보디아, 2015 네팔 대지진 구호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해 말 국경없는의사회에 지원해 합격했다.

국경없는의사회는 무력 분쟁 지역, 감염병 창궐 지역, 자연재해 지역 등 의료 사각지대로 들어가 꺼져가는 생명을 살린다. 현재 4만 3,000명 이상이 전 세계 인도주의 위기 현장 70여 개국, 462개 프로젝트에서 활동하고 있다.

24시간 넘게 잠도 자지 못하고 수술과 치료를 병행하기도 여러 번. 그럼에도 저자는 환자의 상태가 좋아지는 것을 확인할 때면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졌다고 고백한다. 2018년 6월 8일, 팔레스타인 대규모 집회 현장에서 발생한 위급 환자를 살리기 위해 저자는 다른 의사들과 협업 아래 네 시간 반에 걸쳐 수술을 집도한 후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적어 내려갔다. “우리는 그 한 사람을 살려내기 위해 여기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한 사람이 중요했다. 한 생명이 중요했다. 우리는 팀을 이뤄서 한 사람, 또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다.”

그는 구호하러 나갈 때마다 일기를 쓴다. 현장에서 만난 팀원들과 환자들을 기억하기 위해, 지금도 어디에선가 치료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국경없는 병원으로 가다》는 그런 매일의 기록이다.

저자 소개_ 이재헌

정형외과 전문의. 아주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마운트메루 병원에서 2009년부터 2년 반 동안 코이카(KOICA) 국제협력의사로 근무했다. 그때의 경험을 《서른, 꿈 그리고 아프리카》로 펴낸 후, 인세를 탄자니아 비영리단체에 기부했다. 국경없는의사회 일원이 된 후 2016년 4월 요르단 람사, 같은 해 7월 아이티 타바, 2017년 8월 부룬디 부줌부라, 2018년 6월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등 네 차례에 걸쳐 의료 구호 활동을 펼쳤다. 현재 대전의 한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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