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전환점을 맞이하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그 순간은 남들에게 거창하지 않더라도 자신에게는 매우 특별하다. 한때 건축가로서 크게 주목받았으나, 실패를 겪고 창작을 멈춘 버나뎃 폭스도 뜻밖의 장소에서 이런 순간을 맞이한다.

영화 <어디갔어, 버나뎃>은 ‘비포’ 시리즈(<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 <비포 미드나잇>)와 <보이후드>로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는 리차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신작이다.

시애틀에서 남편과 딸과 함께 사는 버나뎃(케이트 블란쳇)은 정착한 지 10년이 훌쩍 넘었음에도 이웃들과 서먹하다. 불면증과 우울증에 시달리지만 가족들에게는 속내를 털어놓지 못하고, 정작 얼굴이 보이지 않는 온라인 가상도우미에게 고민을 이야기한다.

링클레이터 감독은 편지글로 이루어진 원작을 극영화에 걸맞게 각색해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특히 버나뎃이 사회불안장애를 겪는 상황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에피소드를 경쾌한 화법으로 담아 재미를 더한다. 그녀가 지나치게 오지랖 넓은 이웃 오드리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거나, 자신을 알아보고 존경을 표하는 건축학도에게 부담을 느끼고 도망치듯 자리를 뜨는 장면 등은 버나뎃의 불안하고 위축된 심리 상태를 잘 보여준다.

영화는 버나뎃이 건축가로서 어떤 존재였는지를 초반부터 보여주지 않아, 오히려 궁금증을 유발한다. 버나뎃은 남성 위주의 건축계에서 홀로 활동하며 최연소로 맥아더상을 수상한 인물이다. 그녀는 부지에서 20마일 반경에 있는 자재만을 사용한 ‘20mile House’를 설계해 녹색 건축운동의 아이콘으로 급부상한다. 그러나 3년간 공들인 집이 재력가의 계략에 휘말려 순식간에 철거되자, 그녀는 LA 건축계에서 모습을 감춘다.

그녀는 상처를 드러내고 도움을 청하기보다는 속으로 삭이려고만 하다가 마음의 병을 키운다. 극 중 버나뎃을 찾아온 건축학과 교수 폴(로렌스 피쉬번)은 아직 LA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그녀의 고백에 단박에 마음을 읽는다. “너 같은 사람은 창작을 해야 해. 그러려고 세상에 태어난 거고. 네 모든 문제를 해결한 방법은 하나야. 다시 일 시작해. 뭐라도 만들란 말이야.”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버나뎃은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일에 다시 뛰어들 용기를 얻는다. 빼어난 건축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남극에서 말이다. 그녀가 가족여행이 될 뻔했던 남극으로 홀로 떠난 데에는 웃지 못할 사정이 있지만, 영화는 그보다 한 사람이 자신을 짓눌렀던 과거에서 벗어나 미래로 나아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버려진 물건도 건축의 일부로 만들었던 버나뎃은 빙하로 둘러싸인 남극에 도착해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에 매료된다. 그녀는 이곳에서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어머니이기 전에 창작을 사랑했던 건축가 ‘버나뎃 폭스’로 돌아간다. 원제 <Where’d you go Bernadette>은 버나뎃이 잃어버렸던 자신을 되찾은 순간,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과도 같다.

버나뎃의 행동이며 심리를 충분히 공감할 수 있게 한 케이트 블란쳇의 연기는 장면마다 감탄을 자아낸다. 인물의 코믹한 요소를 적재적소에 살리면서도 복잡한 내면 역시 빼어나게 표현하는 능력은 현존하는 여배우 중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그녀는 버나뎃의 외형을 완성하는 과정에서도 제작진과 머리를 맞댔다. 고집스럽게 보이는 갈색 단발머리, 외부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듯한 스카프 등은 스크린에 등장하는 순간부터 버나뎃이 어떤 인물인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남편 엘진 역의 빌리 크루덥, 딸 비 역을 맡은 엠마 넬슨 또한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연기로 몰입도를 높이며, 참견쟁이 이웃 오드리 역을 뛰어나게 연기한 크리스틴 위그도 인상적이다.

10월 8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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