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태석 원장의 방방곡곡] ㉘ - 남사마을의 고가들

기태석 기태석치과 원장

2026-01-08     기태석 기태석치과 원장

남사마을은 마을 북쪽 실개천을 경계로 상사마을과 인접해 있다. 과거에는 개울을 경계로 남사마을은 진주, 상사마을은 단성에 속했는데 한때는 마을이 합쳐져 사월마을로 불리기도 했다. 산청군으로 통합되면서 남사마을과 상사마을로 분리되었다. 동제를 지낼 때는 함께 참여하지만, 전통 마을은 남사마을을 뜻한다고 한다.

마을에는 지정 문화재도 많이 있는데, 우선 ‘남사 옛 마을 담장’이 등록 문화재로 지정되어 마을 전체의 명성을 높여준다. 최씨고가, 이씨 고가, 면우 곽종석 유적, 이사재, 사양정사, 배산서원 등도 등록되어 있다.

남사마을의 전통 가옥은 우리나라 남부지방의 전통 가옥의 구조를 잘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최씨 고택, 이씨 고택, 정씨 고택, 하씨 고택 등을 살펴보면서 이번 기회에 남부지방 고택들의 모습을 알아보도록 하자

우선 우리나라 지역별 가옥 구조의 기본적인 특징을 간단히 설명해 보면 

1. 남부지방: 일자형 구조 

일자(ㅡ)형 구조가 많고 넓은 대청마루와 쪽문이 특징이다. 더운 날씨에 통풍이 잘되도록 개방적으로 지었다. 

2. 중부지방: 남부와 북부의 중간 형태로 ‘ㄱ’ 자형 구조 

‘ㄱ’ 자형, ‘ㄴ’ 자형 등 다양한 구조가 혼재하며 남부보다 마루가 좁고 창문이 좁은 편이다. 남부, 북부의 중간 형태로 더위와 추위에 모두 대비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3. 북부지방; ‘ㄷ’ 자형과 ‘田’ 자형 구조 

춥고 눈이 많은 기후에 대응해 ㅁ자형 폐쇄형 구조가 많으며 방과 부엌 사이에 정주간(일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 겨울에도 생활이 가능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마루가 거의 없고, 온돌 난방이 중심으로 되어 있다. 

이런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가옥 구조를 알고 고택을 감상하면 더욱 흥미로운 것이 보일 것이다. 특히 이곳 남사마을의 고택들은 남부지방의 특징을 잘 보여 주며 특히 19세기 요호부민(饒戶富民/조선 후기인 17~19세기에 등장한 부농층)들의 특징들을 잘 나타내고 있어 전통 사대부 고택들과의 비교하는 데에도 많은 볼거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남사예담촌 이씨 고가 

▲ 이씨 고가 골목 입구에 있는 부부회화나무

남사마을 주차장에서 사수천 방향으로 100여m 정도 가면 오른쪽으로 부부 회화나무가 있는 골목이 나오는데 골목 끝에 가면 이씨 고가의 대문이 나타난다. 

▲ 부부회화나무를 지나면 이씨 고가 대문과 남사마을에서 가장 큰 회화나무가 보인다.

회화나무를 통과해 나지막한 돌담 끝에 있는 이씨 고가 대문은 북쪽을 향해 조금 낮게 만들었는데 이는 왕이 있는 북쪽을 향하여 머리를 숙여 충성심을 다지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있는 회화나무는 남사마을에서 가장 키가 크고 오래된 회화나무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사랑 마당이며 거기엔 동네에서 가장 키가 큰 또 한 그루의 거대한 회화나무가 방문객을 반긴다. 마을에서 가장 키가 크고 수령이 약 450년이나 되며 동네에선 삼신할머니라 불린다. 몸통에 난 배꼽 모양 구멍과 뿌리 위로 돋아난 돌기가 음양의 상징처럼 도드라져 보인다. 그래서인지 배꼽에 손을 넣고 소원을 빌면 아들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 이씨 고가 회화나무 밑둥에 있는 구멍과 돌기

최근에 아침 일찍 대전에서 출발해 방문해 보면 안채가 닫혀 있어 내부를 볼 수 없는 경우가 많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사수천 건너 상사마을을 먼저 돌아보고 오전 늦게 방문해 보니 안채를 활짝 개방해 놓았다. 건축된 지 약 200여 년 된 안채와 사랑채, 익랑채, 곳간채가 안채를 중심으로 ‘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고 왼편으로 따로 담이 둘러쳐진 사당이 있었다.

사랑 마당의 북쪽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 반(3칸)의 팔작지붕을 한 사랑채가 동남향으로 안채와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사랑채는 바깥주인이 거주하며 손님을 접대하는 공간이나 이씨 고가 사랑채는 안채처럼 주로 주거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사랑채의 내부는 안채의 내부와 비슷한데 지붕 아래에 방을 두 줄로 배치하여 앞쪽으로는 생활하는 공간을 두고 뒤쪽으로는 생활용품이나 가재도구 등을 보관하는 공간을 둔 겹집으로 꾸몄다.

한 편에 계자 난간 모양의 마루를 둔 사랑채는 안채와 앞뒤로 나란한 병렬 배치이고 사당은 독립적으로 담장을 둘러 안채의 부엌에서부터 먼 곳에 두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고가에서는 가깝게 둔 것이 특이하다.(둘 다 동쪽) 곳간채 뒤쪽이지만 안채 왼쪽 전면에 있으며 시각적으로 막혀 있는 특이한 배치를 보인다. 

▲ 이씨 고가 사랑채 굴뚝이 사랑채 마당 한복판에 서 있다. 왼편으로 계자 난간을 두른 누마루가 있다.

안채는 전형적인 남부 일자형 구조로 정면 7칸, 측면 3칸 규모로 남부지방에서 가장 잘 나타나는 ‘ㅡ’자형의 건물이다. 앞뒤로 툇마루가 있고 건넛방 툇마루를 대청보다 20cm가량 올리고 밑에 아궁이를 설치했다. 일반적인 사대부 주택에서는 부엌이 사당 방향과 반대편에 있지만, 이 집에서는 부엌이 사당과 같은 동쪽에 자리하고 있다.

안채는 전형적인 한옥인, 반면 사랑채는 과장된 규모와 장식이 눈에 띄는데 이는 20세기 초반에 만들면서 다소 위세감을 보이려고 의도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이씨 고가의 사랑채와 안채에서 건설된 연대가 거의 200여 년가량 차이가 나므로 세월에 따른 한옥의 구조적, 조형적 차이를 비교해 볼 수 있다.

▲ 남사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고택인 이씨 고택 안채. 오른쪽(동쪽) 끝에 부엌이 있다.

산청 남사리 이씨 고가는 남사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집으로 1700년대에 세운 남부 지방 사대부 가옥이다. 남북으로 긴 대지에 사랑채 익랑채, 곳간채가 안채를 중심으로 ‘ㅁ’자 모양을 하고 있다.

네모난 건물 배치로 생긴 마당에 둥근 화단이 있는데 이는 연못을 만들 때 음양오행 사상에서 천원지방(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의 형태로 네모난 연못에 둥근 섬을 조성한 것과 같은 음양의 조화를 잘 이끌겠다는 생각으로 만든 것으로 추정한다. 

▲ 네모난 마당에 조성한 둥근 화단, 음양의 조화를 나타내고 있으며, 초가지붕의 익랑채는 안채(오른쪽) 서편에 있다.

익랑채는 초가지붕으로 정면 4칸, 측면 1칸 반으로 동향이며 남쪽에 부엌과 방, 대청 등을 배치하고 앞면에는 개방된 툇마루를 만들었다. 

▲ 이씨 고가의 익랑채와 안채. 그리고 새로 올린 익랑채의 황금빛 초가지붕이 눈길을 끌고 있다.

곳간채 뒤에 사당이 있는데 맞배지붕이며 붉은 옻칠을 한 4개의 위패(아버지, 조부, 증조부, 고조부)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나란히 모셨다. 그러나 최근 방문했을 때에는 사당을 복원 공사 중이어서 내부를 볼 수 없었다. 

▲ 안채 마당은 ‘ㅁ’ 자형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앞뒤로 있고 동쪽과 서쪽으로 곳간채, 익랑채가 있는데 곳간채 뒤로 보이는 파란 지붕 건물이 사당 건물인데 보수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그 앞에는 새로 보수한 우물이 보인다.

같은 ‘ㅁ’ 자형 집인데도 중부지방과 달리 남부 지역은 덥고 습하므로 공기 흐름을 원활히 하기 위해 건물 사이에 공간을 두어 독채로 지은 것이 특징이다. 명당 중의 명당인지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마을이 불바다가 되었을 때도 이씨 고가는 멀쩡했다고 한다.

▲ 안채 처마 밑에 걸려있는 선반은 간이 냉장고 역할을 해서 선선하게 음식을 보관하거나 말리는 데 이용하였다고 한다. 최씨고가 안채가 유명한데 지금은 공개하지 않아 이씨 고가 것을 소개한다. 마루 밑에 땔감을 보관하는 모습도 지금은 잊혀 가는 정겨운 선조들의 생활상이다.

 

 

최씨고가 

▲ 최씨고가 들어가는 골목길과 대문채

1920년에 지어졌으며 3겹으로 된 사랑채 지붕이 유명하다. 부농이었던 주인의 상황을 말해주듯 집안의 위세를 과시하는 화려한 모양새를 강조한다. 전통적인 남부 지방의 사대부 한옥임에도 곳곳에서 일제강점기에 물밀듯이 들어온 실용적인 구조를 도입해 한옥 특유의 안정적이고 소박한 멋은 없지만, 당대의 반가를 보여 주는 전통적인 남부지방의 사대부 한옥이다. 남사마을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들어가는 골목에서부터 집안의 위세를 느낄 수 있는 높은 담장을 거쳐야만 대문에 도착할 수 있다. 

▲ 최씨고가 사랑채

언제부터인가 최씨고가의 안채로 들어가는 사랑채 양쪽으로 난 문을 개방하지 않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문틈으로 보니 그냥 문만 걸어 잠근 것이 아니라 짐을 쌓아 폐문화 시켜 놓은 듯하여 당분간을 개방하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몇 년 전에 방문하였을 때 사진을 찾아 기억으로 글을 쓰게 되었다. 그 문을 들어서면 안채를 중심으로 사랑채, 익랑채가 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사랑채 좌우에 중문이 두 곳 설치되어 있다.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3칸에 앞뒤 툇간이 있으며 안채와 마찬가지로 5량가로 조성된 팔작지붕이며 안채와 마찬가지로 겹집 형식을 취하고 있다. 사랑채 좌우로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이 있는데, 동쪽 중문을 통과하면 안채가 직접 한눈에 들어오지만, 서쪽 중문을 통과하면 ㄱ자형 담으로 차단되어 안채와 익랑채가 직접 보이지 않게 되어 있다. 이는 전통적인 유교 사상에 따라 남녀 간 생활공간을 분리하여 안 살림을 보호하려는 의도가 분명히 있다. 익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우진각 지붕으로 되어 있다. 

▲ 최씨고가 안채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3칸 규모로 앞뒤에 툇간이 있고 비교적 높은 기단 위에 들보는 5량가로 조성한 높은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안채에는 쇠 방울 하나가 달려 있어 방울이 울릴 때마다 사랑채로 필요한 주안상들을 준비해 달라는 신호로 쓰였다고 한다.

뒤 툇간은 폭이 넓어 수납 기능의 벽장이 설치되거나 방으로 분할되고 있으며 겹집 형식으로 벽장이 설치되거나 방으로 분할되며 실용 위주의 겹집 형식으로 변모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건물의 사용 자재들은 견실하고 이중 방문의 조각 장식도 섬세하고 아름답다.

최씨고가의 또 다른 특징 중의 하나인 뒷간은 여느 변소와는 달리 2층으로 되어 있어 2층으로 올라가야 한다. 이는 당시 ‘뒷간은 위생적이고도 효과적인 인분 활용을 위해 올려 만드는 것이 좋다.’라는 세간의 언급을 따른 것이라고 한다. 변이 아래에 있는 흙 상자에 담기면 재를 덮어 냄새를 줄이고 발효를 촉진해 비료로 사용했다.

또한, 뒷간 남쪽으로 홈을 내 오줌이 자연스레 흘러나와 고이도록 둥근 구덩이를 파 놓았다. 당대 최고의 비료를 효율적으로 활용하려는 아이디어였던 것이다. 지금은 볼 수 없어 뒤에 비슷한 구조로 만든 사효재 화장실에서 살펴보도록 한다. 일반적으로 화장실은 남녀 유별해서 여자용은 안채 인근에 있고 남자용은 건물 밖에 있다. 최씨고가의 경우는 남자용 화장실이 두 개로 하나는 주인 가족 전용이었다고 한다.

또한, 이 집에는 안채 뒤에 있는 장독대에 작은 문이 있어, 여자들의 바깥출입을 엄격히 제한하던 폐쇄적인 문화환경에서 대문을 통하지 않고 드나들 수 있는 이 집안만의 개방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 재미가 있다.

또한, 이 집에서는 곳곳에서 생활의 아이디어가 선보이고 있는데, 처마 밑의 선반 같은 구조는 그늘에서 서늘하게 음식을 보관하던 천연 냉장고 역할을 하던 곳이다. 또한, 대문 빗장이 남다른 거북 모양이다. 왼쪽 목을 당겨야 대문을 열 수 있는 것으로,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주인의 마음에 미소를 짓게 한다. 지금은 현대식 잠금장치와 연결이 되어 있는 모습도 더욱 흥미롭게 한다. 

▲ 최씨고가의 거북 모양의 대문 잠금장치. 왼쪽 거북의 목을 잡아 올리고 닫으면 홈에 걸려 잠기는 구조로 되어있다.

 

정씨 고가

정씨 고가 솟을대문

정씨 고가는 대문을 모두 솟을대문으로 만들었다는 것도 이채롭다. 솟을대문은 집의 위세를 보여 주는 증표인데 정면뿐 아니라 후면도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은 주인이 그만큼 집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 정씨 고가의 솟을대문. 밖에서 본 모습인데 오른쪽 행랑채의 출입문이 집 밖으로 되어 있다. 대문 안으로는 사랑채인 사양정사의 모습이 보인다.

전면 솟을대문은 옆으로 맞배지붕 형식의 기와를 얹은 6칸의 행랑채와 함께하는 장대한 규모다. 언뜻 보면 솟을삼문 같은 위엄이 있으며 충절을 상징하는 홍살을 넣은 것이, 특징이다. 이처럼 장대한 대문채는 이 집안의 품격과 풍부한 경제력을 과시하고 있다. 비록 토석담은 중간중간 흙이 빠져나갔지만, 퇴색도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 준다. 집 안에는 120년 된 배롱나무가 있는데 마을의 배롱나무 중 가장 오랜 수명을 자랑한다.

사양정사에서 본 솟을대문과 행랑채 

▲ 정씨 고가 대문채를 안마당에서 본 모습이다. 특이한 점은 왼쪽의 행랑채의 입구가 대문 밖에 있고 곳간(사진 오른쪽)의 문은 안쪽에 있다는 것이다.

 

사양정사 

▲ 양쪽으로 계자난간의 누마루를 가진 사양정사 뒤로 배롱나무가 보인다.

연일 정씨의 사랑채이자 위패를 모신 재실인 사양정사도 만만치 않은 고가다. 사양정사(泗陽精舍)는 사수천의 남쪽의 학문을 배우고 익히는 집이란 뜻을 담고 있다. 자식들을 교육하고 지인들과 교류하는 용도로 지었다. 사수(泗水)란 공자의 고향인 중국 산둥성 취푸(곡부)에 있는 강 이름으로 공자를 흠모하는 뜻에서 남사마을 뒤를 감싸고 있는 개울을 사수라고 불렀는데 사수천의 남쪽에 있고 하여 사양정사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남사마을의 연일 정씨 토대는 고려의 충신인 정몽주의 후손으로 구한말유학자인 계제 정제용(1865~1907)의 아들 정덕영과 장손 정종화가 남사마을로 이전한 후 선친인 정제용을 추모하기 위해 1920년대에 거대한 집을 마련했는데 이것이 사양정사다. 정제용은 구한말 유학자인 허유와 파리장서의 면우 곽종석의 문인이다. 어느 곳보다 돌담장과 감나무가 잘 어우러진 골목을 돌면 보이는 사랑채가 그야말로 당당하다.

▲ 당당한 기품을 뽐내는 사양정사는 현판에서도 그 힘을 느낄 수 있다.

정면 7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2칸의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2칸의 온돌방, 왼쪽에는 1칸의 온돌방을 두었고 건물 각 끝에는 마루가 1칸씩 설치하여 단조로움을 줄였다. 보통 건물의 2~3배나 되어 단일 건물로는 매우 크다. 궁궐의 회랑처럼 길고 우람하며 천장이 높고 부재가 건실할 뿐 아니라 다락과 벽장 등 수납공간을 풍부하게 설치했다. 당시로서는 새로운 건축 재료인 유리를 사용해 근대 한옥의 변화된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 

▲ 기둥은 과거 민가에서 사용할 수 없는 원형인데 20세기 초반이라는 시대적 여건 덕분에 근대 한옥의 특징적인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다.
▲ 사양정사 배롱나무. 뒤쪽으로 보이는 나무가 선명당의 단풍나무이고 맨 왼쪽 건물이 선명당인데 배롱나무 옆 중문을 통해 안채와 선명당으로 들어간다.

배롱나무는 100일 동안 꽃이 피고 져서 오랫동안 꽃을 볼 수 있는 나무로 선비의 학문 수양과 조상의 은덕이 거듭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심었다고 한다. 수령은 2010년 국립산림과학원에서 측정한 결과 134년 정도 되었다고 하니 2025년에는 대략 150년 정도로 보면 될 것이다.

 

선명당

중문을 들어서면 바로 앞에는 정씨 고가의 안채가 보이고 왼쪽 안채 뒤로 선명당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서 정씨 집안 제사를 지냈으므로 대청은 엄숙한 느낌이 곳곳에 배어있도록 계획했다. 

▲ 선명당
▲ 정씨고가 안채

정씨 고가의 안채이고 지금도 후손들의 생활공간이어서 이른 아침에는 대문과 중문이 잠겨있을 때가 있다. 어느 날 아침 선명당에 들렀을 때 집주인께서 틀어 놓으신 클래식 음악의 선율이 마당에 퍼지는데 안채 뒤쪽의 댓돌에 그냥 주저앉아 홀로 선명당을 한참 동안 바라보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이런 경험은 하고 나면 작은 로또에 당첨되는 행운을 맞은 것 같은 기분으로 하루 종일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 선명당 마당에서 본 안채의 뒷모습인데 땔감을 쌓아둔 모습이나, 문창살의 문양이 정겹기만 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문에 유리가 끼워져 있다. 이는 구한말 상류층에서 많이 달라진 가옥 구조를 보여 주고 있다.
▲ 정씨 고가의 안채로 통하는 또 다른 솟을대문

정씨고가의 대문은 사랑채인 사양정사로 들어가는 대문과 안채로 들어가는 대문으로 두 곳에 있다. 안채로 통하는 정씨 고가의 솟을대문은 새로 만든 듯 벽돌로 벽이 장식되어 있다.

대문을 통과하면 못이 있는 넓은 마당을 지나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을 통과하면 안채와 선명당이 나오고 선명당과 사양정사 사이에 있는 중문을 통과하면 사양정사와 또 다른 솟을 대문을 통해 하씨고가 뒤뜰과 연결되면서 하씨 고가 감나무를 만나게 된다.

 

하씨고가 

▲ 하씨 고가 대문이 오늘은 쪽문만 개방되어 있어 들어가 구경하기에는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구경하는 매화집이라는 안내문을 보고 용기를 내서 염치를 무릎쓰고 쪽문으로 들어섰다.

남사마을의 하씨는 사직공파의 하진을 시조로 하는 진양 하씨를 말한다. 고려 원종 때 문신이었던 하보가 사직하고 여사촌(남사마을)으로 낙향하면서 진양 하씨가 시작된다. 진주 하씨 원정공 하즙의 고택인 하씨 고가의 대청마루에는 ‘원정구려’라는 편액이 있는데 흥선대원군의 친필로 뜻은 ‘원정공이 살던 옛집’이다 라는 뜻이다. 당대 최고의 실력자인 대원군이 친필로 내릴 정도로 시대를 초월하여 구한말 남사마을에서 진주 하씨의 명성이 남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 사랑채 대청마루에 걸려있는 현판은 석파 흥선대원군의 글씨이다.

하즙(1303~1380)선생의 묘는 진주시 상대동에 있는데 묘비에 ‘1303년 니구산 아래 여사촌에서 태어나났다.’라고 하니 남사마을의 역사가 800년 가깝다는 이야기가 여기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1324년 진사를 거쳐 문과에 급제했는데 원이 고려 조정에 소위 감독관을 두어 내정을 간섭하던 시기였다. 고려에서는 몽골 관리보다 그들을 등에 업고 행패를 부리는 사람들에 대한 원성이 높았다. 따라서 사헌부에서 이들의 만행을 규제했고 하즙도 사헌부 관원이었다.

그즈음 행주 지방 기자오의 딸이 원 순제의 제2왕비가 되어 왕자를 낳자, 그의 일가들이 안하무인의 권세를 누리게 되었다. 하즙은 이를 지적해 상부의 눈엣가시가 되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기황후의 인척을 매질해 감옥에서 죽게 할 정도로 강개를 보였다.

하즙의 증손인 하연(1376~1453)은 아버지 하자종의 친구인 목은 이색과 야은 길재로부터 필법과 재주가 뛰어나다는 칭찬을 받았다고 하며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정몽주의 문인으로 부모님처럼 모셨다고 한다. 

태조 5년 1396년 식년 문과에 급제한 후 봉상시 녹사, 춘추관 수찬관을 거쳐 세종 즉위 후 예조참판, 대사헌, 경상도 관찰사, 평안도 관찰사 등을 지내고 대제학, 좌찬성,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에 오른 정통 관료다. 아들 하우명을 김종서의 부관으로 보내 육진을 개척하도록 하여 노블레스 오블리즈를 실행한 조선 청백리 중 한 명이기도 하다. 경력만 봐도 관운이 매우 좋은 사람으로 진주 종천 서원, 합천의 신천서원에 배향되었고 단종 2년 1454년 문종의 묘정에 배향되어 진주 하씨의 명성을 드높였다. 

▲ 하씨고가의 사랑채

그 이후 32대째 내려오고 있는데 지금은 하씨 고가를 방문하면 그 시절의 화려함을 지닌 건물은 없지만 앞마당의 700년이 넘는 홍매 원정매와 600년 넘게 뒷마당을 수놓는 감나무가 넓은 집터와 함께 진양 하씨의 옛 영화를 묵묵히 증언해 주고 있다. 

▲ 하씨 고가 안채를 담장 너머로 보았다.

안채를 들어서려 하니 집안 아낙들 서너 명이 모여 이야기하고 있어 그들을 지나 안채로 들어가기에는 죄송한 마음이 든다. 되돌아 나와 담장 밖에서 안채를 볼 수 있는 곳에서 사진을 찍어보았다. 

▲ 사랑채 앞마당에 있는 하씨 고가 700년 된 원정매
▲ 하씨 고가의 뒷마당에 있는 600년 넘게 버티고 있는 감나무에선 올해도 탐스런 감이 매달려 있다. 뒤로는 사양정사로 들어가는 정씨 고가 솟을대문이 보인다.

감나무는 하연이 어렸을 때 직접 심었다고 하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나무의 건강에 따라 마을의 길흉화복을 점쳤다고 한다. 또한, 하연이 글을 읽을 때 날씨가 춥고 비바람이 치면 도깨비불이 나와서 감나무를 보호해 주었으며 도깨비가 나타나면 하씨 집안의 경사가 있었다고 한다. 

▲ 1986에 세운 표지석 ‘문효공경재선생수식시목’

1986년에 세운 표지석에 ‘문효공경재선생수식시목’이라는 글과 함께 580년이 되었다고 하니 2025년이 지났으니 620년이나 된 고목 밑둥의 굵기와 이끼 낀 흔적은 세월을 이기고 버텨온 자랑스러운 훈장과도 같은 것이다.

다음으로는 남사마을에 남아있는 눈여겨 볼만한 건물들과 기산 박헌봉 선생의 국악 사랑이 깃들어 있는 기산국악당, 이순신 장군의 향기가 스며들어 있는 니사제, 근대 유림들의 독립운동의 역사가 깃들어 있는 면우 곽종석 유적들이 남아있는 남사마을에서 사수천 건너에 있는 상사마을로 떠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