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태석 원장의 방방곡곡] ㉚ - 사수천, 예담길을 따라 역사의 향기를 맡으며
기태석 기태석치과 원장
예담길
이사재를 나와 동쪽으로 남사마을을 한눈에 조망하면서 걸을 수 있는 예담길, 즉 둘레 길이 있는데 길이는 약 2.4km 정도 된다. 남사마을에서 사수천을 건너가면 상사마을인데 기산 국악당과 이사재를 거쳐 예담길을 가다 보면 면우 곽종석 생가, 이동 서당 등 애국지사 면우 곽종석 관련 유적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애국지사들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사수천을 휘돌아 가며 걷다 보면 전혀 뜻밖의 선물을 받았을 때 느끼는 희열을 맛볼 수 있다.
아름다운 하천을 따라 정겹게 걸을 수 있는 길이므로 남사마을을 방문한다면 이 산책길을 일정에 넣고 1시간 정도 할애해도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이사재를 나와 사수천을 끼고 걷는 산책길 초입에는 길 양쪽에 애국지사들을 수호하는 장승처럼 생긴 두 개의 커다란 바위가 마주하고 있다. 사진 왼쪽 바위에는 장암(丈岩), 오른쪽 사수천에 걸쳐있는 큰 바위에는 우암(友岩)이란 각자가 새겨져 있다.
이 두 바위를 거북바위라 부르는데 형상은 그렇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글의 의미가 장암은 어른 거북을 우암은 새끼 거북을 뜻하여 어른인 부모 거북이 물가의 새끼 거북을 항상 바라보며 보살피고 있는 모습이라고 한다.
장암과 우암을 지나면 나오는 190m 길을 ‘개구쟁이 길’(열세 안팎의 어린 나이를 말하는 충년(沖年 길)이라 칭한다는 안내판이 나오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한시가 적혀있다.
부모재(父母在)어시든 (부모가 살아 계시면)
불원유(不遠遊)하며 (멀리 가서 놀지 않으며)
유필유방(遊必有方)이니라 (노는 것이 반드시 방향(목적지)이 있어야 한다.)
선비마을답게 성리학의 근본 중 하나인 효를 일깨워 주고 있다.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 되더라도 부모의 보살핌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사수천과 청도탄
남사마을을 가로지르는 사수천에 있는 거북바위 중 우암이라고 부르는 바위 옆에 있는 계단을 따라 물가로 내려서면 ‘청도탄(聽悼灘/들을 청, 노 도, 여울 탄)'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노를 젓는 소리가 들리는 여울이란 뜻이다. 탄이란 우리말로 바닥이 얕고 물살이 센 곳에 붙이는 이름이다.
“무이산 위엔 시선이 있고
산 아래 찬 물줄기는 굽이굽이 맑구나
그중에도 기막힌 절경을 아시고 싶거들랑
뱃노래 두세 가닥 한가로이 들어보소.”
棹歌閑聽兩三聲(도가한청양삼성)
주희의 무이도가의 첫 서시 중 마지막 구절에 도, 청이란 글이 나온다. 아마 이 귀절을 따와 청도탄(노 젓는 소리를 듣는 여울)이라고 한 것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답사를 다니다 보면 위와 같은 글을 접하고 현장에 찾아가서는 글자를 찾아보곤 하는데 한 번에 글자를 찾지 못하고 올 때가 있다. 그러면 궁금해 다시 또 가야 하는 사태가 일어난다. 이 청도탄이란 각자도 몇 번 깜빡 잊고 와서 네 번째 방문에서 겨우 찾았던 사진이다. 이런 것이 고적 답사의 숨은그림찾기나, 보물찾기 같은 매력이라 할 수 있다.
거북바위를 지나 조금 걷다 보면 사수천변 고목 나무 밑에 조그만 쉼터가 나오는데 이제의 증조할아버지인 이조년의 ‘다정가’를 적어놓은 안내판이 있어 이제의 영모재와 사효재를 바라보며 시 한 수 읊어보며 잠시 쉬어감도 좋을 듯하다.
곧이어 나오는 데크길과 인공으로 조성한 터널 숲을 지나며 겨울 사수천을 한가롭게 노니는 백로와 물오리 떼를 보면서 남사마을의 정취에 흠뻑 빠져본다. 시공을 초월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보면 이윽고 조선시대 마지막 유학자이자 애국지사인 면우 곽종석선생의 생가터를 복원한 3.1운동 기념공원과 생가가 나온다.
면우 곽종석 생가
선생의 성은 곽이요 본관은 현풍이다. 종석은 그 이름이며 자는 명원, 호는 면우이다. 구한말을 대표하는 조선시대 유학자이며 독립의사였던 면우 곽종석선생의 생가에 조성한 공원이 나온다. 기념 광장에는 곽종석 선생이 유림을 대표로 서명한 유림 독립운동인 파리장서 운동의 뜻을 기리는 파리장서기념탑이 우뚝 서 있다.
파리장서기념탑
이 기념탑은 곽종석 선생 등 유림 대표 137인이 구국의 염원을 담아 작성한 독립청원서를 프랑스 파리평화회의에 보낸 유림 독립운동인 파리장서운동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서부 경남을 중심으로 지역발전에 뜻을 같이하는 40여 명의 ‘진주목 문화사랑방’이란 모임에서 2017년에 세운 것이다.
높이 5m, 둘레 7m 규모로 작품명 ‘기억의 방 2017- 유림의 숲’으로 조각가 김성균의 작품이다. 민족의 암흑기에 독립의 불을 밝혔던 선조들의 의지를 기리며 등대와 지주 형상으로 제작됐고 유림의 그 높은 기개와 충효 사상을 소나무와 대나무의 형상으로 표현했으며 그들의 학습과 삶의 터전이었던 덕산서원을 부분 형태로 배치했다.
면우 곽종석 생가
면우 선생은 1846년 6월 24일 단성면 사월리 초포동에서 태어나 유학을 부흥시키고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다. 1919년에는 유림을 대표하여 파리강화회의에 보낸 파리장서로 인하여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른 뒤 돌아가셨다.
장서문을 들어서면 생가터에 정면으로 잘 지어진 면우재가 보인다. 가운데 대청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으로는 평생을 무명옷과 짚신으로 지냈고, 초근목피로 연명할 만큼 가난하고 청빈한 삶을 살았던 면우 곽종석 선생이 면학하던 방을 재현한 ‘유학자의 방’과 왼쪽으로는 면우 곽종석 선생의 제자 김창숙 선생과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를 작성하고 있는 장면을 재현한 ‘독립운동가의 방’으로 꾸며놓고 전면을 유리창으로 전시하고 있었다. 새로운 유적 복원을 시도한 것으로 보이는데 색다른 전시 방법에 조금은 어색해, 고개가 갸우뚱해지지만, 진화하려는 노력에는 감사를 드린다.
산청군에서는 생가 옆에는 예담재와 남사재라는 한옥 체험관을 만들어 놓고 한옥을 체험할 수 있는 숙박시설도 만들어 놓았고, 파리장서 기념탑과 이동서당, 유림독립운동기념관 등과 함께 면우 선생을 기리는 산청 유림독립운동 테마공원을 조성해 놓고 있다.
우리는 이쯤에서 조선 말기 우국지사이자 마지막 성리학의 대가였던 면우 곽종석 선생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도록 하자
면우 곽종석(1846~1919)
선생은 현종 12년(1846년) 6월 24일 단성면 사월리 초포동에서 어머니(해주 정씨 정광로) 와 아버지 곽원조와의 사이에서 2남 5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꿈에 큰 돌산이 입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태어나서 아명이 ‘돌뫼’였다고 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성리학 경전을 비롯한 역사서는 물론 정치, 제도, 군사, 의술 등 다양한 분야에도 관심을 가지다가, 본격적으로 학문에 뜻을 두고 영남의 대 유학자인 한주 이진상 문하로 들어가게 되었고 거기서 성리학과 퇴계학을 계승하면서 조선시대 말 대표적인 유학자로 우뚝 서며 존경을 받게 된다. 1880년 모친상을 당했을 때는 상복도 벗지 않고 온돌방에 거처하지 않았다고 한다.
1895년 조정에서 비인 현감을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않았고 그해 8월 민비가 시해되자 분격하여 서울에 올라가서 포고문을 지어 여러 나라 공사에 보냈고 1896년에는 덕유산과 가야산 사이에 있는 거창군 다전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
그 이후 1899년, 1903년에도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자, 이에 고종은 입궐하라 명한다. 이에 평복을 입고 뵙기를 고집하니 고종은 유건에 도포 차림으로 돈량전에서 만났다고 한다. 여기서 고종은 정치하는 길을 묻고, 다시 벼슬을 내리며 급한 시무를 물으니 이에 선생은
승정학; 올바른 학문을 높여서 장려를 하여야 하고,
결민심; 민심을 수습하여 단결되게 하여야 하고,
정군제; 군사의 체제를 제정 확립해야 하고,
절재용; 국가의 재산 확보를 위해 절약을 해야 한다.
라는 시무 4조를 올렸다고 한다. 이에 고종은 크게 감동하여 그에게 서울에 거처를 마련해 주었으나 그는 마다하고 돌아오고 만다.
1905년(55세 때)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다시 서울에 가서 ‘을사오적’을 처단하라는 상소를 올린다. 고종과 대면을 청했으나 관리들이 왕에게 알리지 않아, 돌아오는 길에 입궐하라는 통지를 받았으나 거창 다전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는 이후 제자 교육에만 전념하자 전국에서 찾아오는 제자들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선생은 남명 조식 선생 이후 3백여 년 동안 끊어졌던 영남우도의 학통을 재건하면서 많은 후진을 키우면서 조선의 유학 계보의 마지막을 장식한 거유가 되었고, 또한 문장에 능통하여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방대한 분량의 면우문집(165권)까지 남겼다.
그는 1910년에 일본에 합병이 되자 통곡하며 세월을 보내다가 3.1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에 유림이 포함되지 않은 것에 분개하던 중 독립을 염원하던 유림의 뜻을 모아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를 작성하게 되었고, 이것이 1919년에는 파리장서라는 이름으로 보내게 된다. 그는 이 일인 ‘한국유림단 사건’으로 투옥되면서 고초를 당하다 병보석으로 나온 뒤 74세의 일기로 별세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의 업적은 조국의 독립운동과 파리장서로 요약되면서 우리나라 광복 운동의 초석과 기반을 구축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움직임에 대하여 일본제국주의는 조선 유림을 사칭하며 매국노 이완용을 정치단체 대표로, 김윤식을 유림단체 대표로 하여 일본 정부에 독립불원서를 제출하였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이 1918년 끝나고 세계평화회의가 열리면 한국 문제가 반드시 문제가 될 것이라고, 판단한 일본의 치밀한 간계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때 서울에서 윤충하 등이 면우를 찾아와 ‘독립청원서 운동’의 대표가 되어 줄 것을 요청하자, 그는 망설임 없이 즉석에서 승낙한다. 이 독립청원서의 명칭이 ‘파리장서’로 변하면서 ‘파리장서운동’이란 말로 불리게 되면서, 3.1운동은 국내적, 파리장서운동은 국제적인 운동으로 성격을 달리했지만, 근본적으로는 독립운동이라는 목적은 같았다.
면우는 장서를 지어 제자인 심산 김창숙에게 외우게 하고 곽연을 불러 글을 쓰게 하여 그 종이로 신총을 만들어 미투리 한 켤레를 준비하게 하고 김창숙에게 중국으로 가서 우리 동지들과 중국 정부와 손을 잡고 일하라고 지시한다. 김창숙은 일단 일본의 감시망을 뚫고 서울로 가서 우선 전국 유림 대표 137인의 서명을 받았다.
중국으로 가기 위해 통역으로 박돈서, 이현덕, 김창숙 세 사람으로 정하고 유림이 모아준 자금을 상인들의 물건 속에 숨겨 가지고 가서, 봉천에서 찾는 방법으로 자금을 옮겼다. 상해에 도착한 일행은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회의를 거쳐 파리에 주재하고 있던 김규식을 통해 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장서를 독일, 중국, 불란서 등 각국의 말과 영문으로 인쇄하여 영사관과 신문사 등에 우편으로 보내지자, 동시에 전 세계가 알려지게 되었고 국제 여론 환기에 일대 경종을 울릴 수 있었다. 이에 일제는 국제적으로 간담이 서늘해지게 되면서 전국 유림단체에 검거 바람이 일어나게 된다. 이것이 유림단 사건이었다.
면우 선생을 비롯해 영호남에서 잡힌 유림은 모두 대구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2년간의 실형이 언도되자 “나는 살아서 돌아갈 기약을 하지 않고 여기에 왔다. 왜 종신형을 선고하지 않고 하필 2년이냐? 내가 공소할 곳은 하늘밖에 없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후세에게 영원히 각인되어야 할 명언을 남긴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병보석으로 나오자마자, 오늘 같은 광복의 영광을 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분의 숭고한 뜻을 알고 있는 후손들은 선생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그분이 거쳐 갔던 거창, 남사마을 등 사적지마다 사당과 비석을 세워 그의 업적을 기념하고 있다.
산청 이동서당
면우 곽종석 생가에서 100여m 정도 하류 쪽(동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이동서당이 왼쪽으로 보인다. 이름도 니구산의 동쪽에 있는 서당이라는 뜻이다.
산청 이동서당은 면우 곽종석(1846~1919)을 기리기 위해 유학자들과 제자들에 의해 면우 곽종석이 죽은 후 지은 서당이다. 곽종석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로 1919년 조선의 독립을 위해 파리장서를 작성하고 전달하다 경찰에 붙잡혀 체포되었다. 체포 후 두 달 만에 병으로 풀려났으나 곧 세상을 떠났다.
이동서당은 1920년에 건립되었으며 1984년 앞뜰에 유허비(선인들의 자취가 남아있는 곳에 그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를 세우고 1991년에는 강당 뒤편에 사당을 지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1칸 반의 팔작지붕으로 지었고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이동서당에 처음에 들어가면서 느껴지는 것은 선생의 위업에는 못 미치는 규모여서 당황하게 된다. 처음에는 서당이 아닌 서원으로 지으려 하였으나, 당시 건축에 사용할 목재를 구하기 어렵고 기존에 있던 집의 재료로 필요한 건물을 다 지을 수 없어 서당을 지었다고 한다. 선생의 뜻과 행적에 비하면 다소 초라한 듯하나, 거창 다조를 비롯한 선생의 자취가 남아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선생의 기적비 등이 남아있어 선생의 정신을 밝혀주고 있다.
강당 뒤로 돌아가면 면우 곽선생을 배향하는 사당이 내삼문과 함께 담장 너머로 나지막이 자리잡고 있다. 이동서당을 나와서 사수천을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바로 옆으로 ‘한국유림독립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유림독립기념관
정문인 독립문을 들어서면 새로 만들어진 유림독립기념관이 정연한 자세로 방문객을 맞이한다. 필자는 갑자기 비가 오던 어느 날 아침, 홀로 우산도 없이, 아무도 없는 기념관을 방문했을 때 맞아주셨던 해설사를 잊을 수 없다.
관람을 마치고 비를 맞고 남사마을 주차장까지 걸어갈 생각으로 길을 나서자, 해설사 선생님은 자기 차로 바래다준다고 하신다. 극진한 호의에 손사래를 치니 그럼, 우산을 빌려주면서 남사마을 주차장 근처에 어느 집에다 맡기라고 한사코 손에 우산을 내 손에 쥐어주신다. 아직 사대부 집안의 접빈 문화가 살아있다는 생각에 지금도 잊지 못하는 마을이 되었다.
박물관을 들어서자마자 파리장서 원문 현판이 걸려있다. 마지막 서명 부분에 보면 유림대표 곽종석외 136인이라는 글귀에서 조선시대 말 유림을 대표하는 어르신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유림독립기념관에는 독립운동하였던 유림들의 활동 사항을 전시함으로써 조선 성리학의 마지막 불꽃을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경상우도의 남명 조식으로부터 내려오는 행동하는 성리학의 정신을 면우 곽종석이 이어받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제자였던 심산 김창숙 선생의 영향을 받은 나석주 의사에 의해 한반도 경제 수탈의 원흉이었던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지는 의거가 일어났다는 사실에서 독립운동에 가담한 유림의 활동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석주 의사
전시실에 들어서면 나석주(1892~1926)와 심산 김창숙 선생(1879~1962)과 운명적인 만남을 소개하고 있다.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 2천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라!”라는 말을 남긴 나석주 의사는 1892년 황해도 재령군 복률면 진초리에서 태어났다. 서당에서 한문을 배운 나석주는 백범 김구가 세운 양산학교에 들어가면서 굳센 독립투사로 성장한다. 나석주는 지방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독립자금을 마련하다 수사망이 좁혀오자, 중국으로 망명하여 의열단에 들어가 활동했고, 이동휘 선생이 세운 무관학교에서 전략 전술 훈련도 받았다.
심산 김창숙 선생과의 운명적인 만남
1926년 나석주 의사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 다가왔다. 망명한 유림이자 저명한 독립투사인 심산 김창숙 선생과의 만남이었다. 그해 5월 김구 선생과 김창숙 선생은 국내외 정세를 토론하며 독립운동의 방향을 함께 고민하였다. 나석주 의사는 김창숙 선생으로부터 경제 침탈의 총본산인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 식산은행을 폭파하여 일제를 응징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구체적인 거사를 계획하였다.
적의 심장에 폭탄을 던지다
1926년 12월 중국인 마중덕으로 변장한 나석주 의사는 인천으로 잠입했다. 12월 28일 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지점에 폭탄을 던지고 총격전을 벌여 경기도 경찰부 경감과 동양척식회사 차석 등 3명을 사살하고 총알이 떨어지자, 교전 중 자결하였다.
김창숙 선생(1879~1962)
“결코 내 지조를 바꾸어 남에게 변호를 위탁하여 살기를 구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남겼던 심산 김창숙 선생은 단채 신채호, 만해 한용훈과 더불어 3절(三絶)의 한 분으로 평가받는 심산 김창숙 선생은 경북 성주 출신으로 면우 곽종석의 제자인 유림 출신이다. 항일 독립운동과 광복 후에 통일운동과 군사독재에 맞서 반독재투쟁, 민족사학 육성에 앞장선 대표적인 민족 운동가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서울로 올라가 을사오적을 성토하는 상소를 올렸다. 대표적인 친일 단체인 일진회가 한일 합병론을 제기하자 “이 역적들을 성토하지 않는 자 또한 역적이다”라고 울분을 토했다. 1909년 사립 성명학교를 설립하고 신교육을 실시하기도 했다.
스승인 면우 곽종석 선생과 유림 대표 137인의 서명을 받아 파리 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인 ‘파리장서’를 제출하였다. 1925년부터 1926년까지 국내에 잠입해 해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필요한 군자금을 모금했으며 나석주 의거를 이끌어내는 등 ‘2차 의림단 의거’를 이끌었다.
1927년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된 김창숙 선생은 1928년 14년 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때 고문 후유증으로 걷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스스로 ‘벽옹(앉은뱅이)’이라고 부르며 꼿꼿한 선비정신을 보여주었다. 1934년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1945년 8월7일, 조선 건국동맹의 남한측 대표라는 혐의로 또다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중에서 광복을 맞게 되었다. 광복 이후에도 심산 선생의 삶은 성균관대학교 초대 총장을 역임하고 통일운동과 민족사학 육성, 반독재 운동으로 이어진 투쟁의 연속이었다.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고 그해 5월 10일 84세 일기로 영면하였다.
이처럼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유림의 활동을 다시 일깨워 주는 전시관인 만큼 전시물을 보면서 나 자신도 우리나라의 독립에 유림들의 활동을 애써 외면했거나 과소평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던 뜻깊은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지금껏 우리가 여행해 온 경상우도의 성리학적 선비정신을 배우고 있던 차에 마지막 선비인 면우 곽종석을 남사마을에서 만나면서 이번 여행을 마치게 되니 더 뜻깊다는 생각이다.
이번 필자와 함께한 여행은 30회에 걸쳐 함양, 거창의 정자 문화를 시작으로 함양 일두 정여창, 산청 남명 조식, 남사마을에 면우 곽종석까지 그리고 학계나 정치적으로 꼿꼿한 선비정신을 보여주신 청계 김일손, 동계 정온 등 조선시대 전반에 걸친 선비의 고장에 흐르는 정신문화, 정자 문화를 살필 수 있었고, 독립운동 정신에다 항일, 민족운동, 반독재 운동까지, 그리고 조선시대부터 한국 근대사까지 이곳에서 살다 가신 선조들이 끼친 영향은 경상우도를 넘어 한민족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는 좋은 여행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후 종착역 같은 진주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다루기로 하고 이번 필자가 시작한 경상우도 선비문화 여행은 이곳 남사마을에서 마치고자 한다.
여기서 진주까지 논한다면 지금까지 해왔던 이야기만큼 해야 하니 이만 줄이고 다음을 기약하기로 한다. 그동안 지면을 통해 만났던 경기도 치과의사 선생님들과의 좋은 만남을 기억하며, 다음에도 기회를 주신다면 이번처럼 시리즈 같은 긴 여행이 아닌 단편적인 답사 기행문으로 만나 뵙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지면을 할애해 주신 덕분으로 단편적으로 정리되었던 이야기가 경상우도의 깊은 산길을 타고 지리산을 넘어오듯이 글이 이어지면서 정리된 것 같아 감사를 드린다. 전성원 회장님과 덴티스트 관계자 여러분, 특히 이서영 경기도 치과의사회 공보이사님과 글을 예쁘게 다듬어 올려주신 주현호 기자님께,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동안 읽어주신 독자분들에게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올리며 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