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태석 기태석치과 원장

그 밖의 남사마을 건물들

다른 마을도 마찬가지지만 우리나라 현대사적으로 볼 때 남사마을이 오늘의 모습을 간직할 수 있었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한다. 해방 직후에 치열하게 좌우 대립으로 갈라져 체제전쟁을 치르면서 많은 피해를 입었고, 한국전쟁 때에는 연합군의 대규모 폭격으로 상당 부분 파괴되기도 했다고 한다. 특히 남사마을 중앙에 있던 99칸의 최씨고가는 폐허처럼 되면서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을 정도까지 되었었다고 한다. 다행히 후손들의 마을을 지키려는 의지와 노력으로 지금의 모습처럼 부활할 수 있었다.

성주이씨 경무공 이제 영모재

조상의 은덕을 사모하는 집이라는 뜻을 지닌 남사마을 영모재는 태조 이성계의 셋째 사위인 경무공 이제의 재실이다. 1933년 대종가가 광주 도촌에서 남사로 이주해 온 후 1987년에 세워졌다. 현재는 경무공 이제를 제향하고 종원 간 회합 및 친목을 도모하는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 성주 이씨 경무공종회 영모재
▲ 성주 이씨 경무공종회 영모재

이제개국공신교서(국립진주박물관 국보)

남사마을에서 일가를 이루었던 성주 이씨 가문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국보 제324호인 가보가 있다. 조선 개국 때 태조가 공을 세운 경무공 이제(?~1398)에게 내린 ‘이제개국공신교서’(국립진주박물관 소장)인데, 이 개국공신교서는 왕이 직접 내린 교서로 유일본이다.

교서의 내용은 이제에게 내리는 교서임을 밝히고, 고려 말 정치의 난맥상과 국왕들의 부덕함, 그리고 건국의 정당성을 천명하고 그 과정에서 이제 등이 크게 공을 세워 ‘개국일등공신’에 봉한다고 기록하였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마지막으로 연월일을 적고 그 위에 ‘고려국왕지인’을 찍혀 있는데, 이는 고려말 1370년 공민왕 19년 명나라에서 내려준 어보가 조선시대 초기 문서에 사용된 유일한 사례여서 주목받고 있다. 당시 아직 조선의 어보가 준비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제개국공신교서’는 1392년 조선 건국을 도와 대의에 앞장섰던 배극렴, 조준, 정도전 등 16명에게 내려진 왕명 문서이고 녹권(공신도감에서 내린 포상증서)은 관문서인데 위계상 하위에 해당하는 개국원종공신녹권(국보 제69호)보다 5년이나 앞섰으나 국보로 지정되지 못하다가 1999년 보물로 지정되었다가 공신 녹권은 몇 점이 남아있지만, 교서는 이것이 유일한 것이어서, 뒤늦은 2018년 6월 27일에야 국보로 승격이 된 것이다.

이제는 종묘의 공신전에 배향된 83명 중 태조의 공신은 7명인데 그중 한 명이다. 이성계의 셋째 딸 경순공주의 남편이자 정몽주 격살에 참여한 개국 일등 공신으로, 흥안군에 봉해졌다. 이제의 증조할아버지인 이조년(1269~1343)은 한국인이라면 거의 다 알고 있는 ‘다정가’의 작가이고, 부친은 고려 말 권신이었던 이인임의 아우인 이인립이다. 그는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 일파로 몰려 이방원에 의해 살해되었지만, 세종 때 신원(원통함을 풀어 회복시킴)되어 태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이조년의 ‘다정가’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데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 양, 잠 못들어 하노라”

▲ 사수천 너머로 남사마을 영모재가 건너다 보이는 정자나무 아래에 다정가를 읊조리게 만든 쉼터가 있다.
▲ 사수천 너머로 남사마을 영모재가 건너다 보이는 정자나무 아래에 다정가를 읊조리게 만든 쉼터가 있다.

이제개국공신교서비

경무공 이제 영모재에서 나와 남사마을 쪽으로 사수천을 100여 m를 올라가면 공터에 이제 개국공신교서가 국보로 승격된 것을 기념하는 탑비(이제 개국공신교서비)가 세워져 있다.

조선 개국에 큰 공을 세운 경무공 이제에게 태조가 1392년 10월에 개국공신 일등에 봉하며 내린 개국공신교서이다. 이 교서는 조선 최초로 발급된 공신교서로서 실물이 공개되어 전하는 유일한 개국공신교서이며 조선시대 제도사, 서예사 연구 등 학술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어 2018년 6월 27일 국보로 승격되면서 이 교서의 원문과 내용을 비석에 새겨 후세에 전하고자 세웠다고 한다.

사효재(思孝齋/효를 생각하는 집)

▲ 사효재와 향나무 기둥
▲ 사효재와 향나무 기둥

이제를 모시는 재실인 영모재 바로 옆에는 남사마을이 자랑하는 사효재가 있다. 이제의 8대손인 이윤헌의 효행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1687년 마을에 천연두가 만연하자 이윤헌은 부모를 모시고 산촌으로 피접(병을 피해 거처를 옮김)을 갔는데 산적이 부친에게 칼을 들이대자, 부친을 보호하려고 막아서다가 온몸에 칼을 맞고 팔이 절단되었다. 그로 인해 8년 뒤 사망하자 정부에서 정려를 건립하고 실행록을 종가에 소장하도록 했다고 한다.

▲ 사효재의 향나무
▲ 사효재의 향나무

사효재에는 수령이 520년이나 된 향나무가 있다. 이 향나무는 사효재를 짓기 전에 심겨져 있던 것이라고 하며 집안에서 제례를 올릴 때 향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이 나무는 수형도 멋이 있지만 땅에서 용트림하며 솟아오르는 줄기의 활기찬 모습에 앞으로도 천 년은 거뜬히 살 만큼 건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 사효재 앞에 물들은 담쟁덩굴의 단풍은 황토벽과 담장, 대문채와 함께 어울려 토속적인 한국미를 뽐내고 있다.
▲ 사효재 앞에 물들은 담쟁덩굴의 단풍은 황토벽과 담장, 대문채와 함께 어울려 토속적인 한국미를 뽐내고 있다.

사효재에 단풍이 물들을 때에는 한옥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담장과 황토벽과 어울린 담쟁이덩굴의 조화는 인공적으로 만들 수 없는 자연미의 극치를 보여준다. 필자는 이런 아름다움이 한국적인 동시에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하기에 우리가 아끼고 보존해야 할 우리만의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효재에서는 눈여겨볼 만한 것이 또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문 옆에 보이는 조그만 문짝이다. 대문채 왼쪽이 화장실로써 계단을 올라야 하는 2층 구조로 되어 있는데 바깥 판문을 열어 퇴비를 사용하기 쉽게 설계되어 있다. 사효재를 방문하면 꼭 확인해야 하는 재미있고 실용적인 가옥구조이다. 이런 구조는 최씨고가 안채에서 이미 실용성을 입증한 구조였는데, 지금은 최씨고가 안채를 공개하지 않아 볼 수 없게 되어 이곳을 소개한다.

▲ 안에서 보면 화장실이 계단을 올라가는 2층 구조로 되어 있는데 아래로 떨어진 용변을 집 밖에 있는 쪽문을 통해 퇴비로 사용하려는 실용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화장실이다.
▲ 안에서 보면 화장실이 계단을 올라가는 2층 구조로 되어 있는데 아래로 떨어진 용변을 집 밖에 있는 쪽문을 통해 퇴비로 사용하려는 실용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화장실이다.

기산국악당

이제는 사수천을 건너서 행정상으로는 단성면 사월리 상사마을로 가서 근대 문화의 여명기에서 우리나라 음악을 온몸을 바쳐 지켜내신 기산 박헌봉 선생의 유적과 그분의 삶을 살펴보도록 한다.

▲ 기산 박헌봉 선생의 생가터에 세운 기산국악당
▲ 기산 박헌봉 선생의 생가터에 세운 기산국악당

국악 문화재를 지켜낸 인물. 기산 박헌봉

▲ 기산 박헌봉 선생 영정
▲ 기산 박헌봉 선생 영정

일제강점기를 포함한 근대 문화의 여명기에 우리나라 문화재들은 많은 수난을 겪게 되는데 그런 가운데 가느다란 희망을 부여잡고 우리 문화를 지키는데 전 재산은 물론 자신의 모든 열정을 평생 쏟아부었던 선각자 몇 분이 있었다. 우리는 그들을 잊어서도 안 되고 그들의 고마움을 안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분들 중에 우리나라 미술사를 개척하셨던 우현 고유섭 선생님(1905~1944), 전 재산을 털어 전 세계로 팔려나가던 문화재를 사들여 보호했던 문화재 수집가이자 문화재 보존가였던 간송 전형필 선생(1906~1962), 우리의 민속학의 개척자이자, 보존에 온 힘을 쏟아부으셨던 석남 송석하 선생님(1904~1948) 그리고 우리나라 고유의 음악을 지키고 가꿔나갈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던, 기산 박헌봉 선생님(1906~1977)이 계셨는데 그중에 기산 박헌봉 선생님은 이곳 남사마을 분이시기에 여기서 소개하고자 한다.

▲ 남사마을 건너편 상사마을에 있는 기산국악당 정문 앞에 있는 기산 박헌봉 선생 흉상
▲ 남사마을 건너편 상사마을에 있는 기산국악당 정문 앞에 있는 기산 박헌봉 선생 흉상

남사마을 명문가의 아들 기산 박헌봉

기산 박헌봉(1906~1977) 선생님께서는 1906년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서 태어나셨다. 그곳이 지금은 예담마을로 알려진 남사마을에서 사수천이라는 내를 건너면 나오는 상사마을이다. 그는 명문가 박성호의 2남으로 태어나서 어린 시절에는 한학 공부를 했으나 아홉 살이 되던 어느 날(1914), 서당에 다녀오는 길에 민요를 처음 접하고 국악에 뜻을 두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1921년에 상경하여 1923년에 서울 중동중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게 된다.

국악계의 큰 스승

그는 진주의 명인 명창들에게 민속악을 배우고(김덕천, 임한수에게 가야금 풍류와 병창 등), 청년기에는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에 대항해 민족음악 부흥에 헌신했다. 국악의 경전이라는‘창악대강’을 저술하여 국악 이론의 기틀을 마련했고, 1934년 진주 음률연구회를 만들어 풍류와 민속악을 연구하고 2년 후 상경하여 국악의 여러 분야를 섭렵하셨다.

1941년 조선음악협회에 조선악부를 창설하고, 해방 직후 국악건설본부를 만들고, 1947년에는 대한국악원의 원장으로, 또한 1960년에는 국악 최초의 교육기관인 ‘국악예술학교’(현 국립전통예술 중. 고등학교)와 최초의 ‘국악관현악단’을 만들자, 그의 이름 앞에는 항상 국악계의 큰 스승, 국악 교육의 선도자라는 수식어가 붙게 되었다.

1960년 기산이 국악예술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을 하면서 건학이념에 전통음악의 정체성은 민속 음악에 있음을 넣어 이를 전승 발전시켜야 한다는 당위성을 명확히 밝혔다. 특히 일제강점기의 민족 말살 정책과 서구문화의 난입으로 전통예술이 수난을 받고 왜곡되는 역사 속에서 우리 민속 음악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계승해서 창조적 발전을 이룩하기 위해서 노력하신 것이다. 지금 보더라도 어려운 일인데 당시로서는 감히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는 것이, 그를 더욱 우러러보게 한다.

박헌봉 선생님 업적

그 과정에서 그는 사재를 들여가면서 전국에 산재한 민족예술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고 이를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는 데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우리 겨레의 정서가 담긴 오래된 민요가 사라져 가는 것이 안타까워 손수 산간벽지를 돌아다니며 총 274곡의 민요를 채집하였다.

또한, 거기에 그치지 않고 KBS를 통해 음원을 송출함으로써 일반인에게 민요에 대한 인식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는 역할을 하셨고, 민속 문화를 문화 콘텐츠로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을 처음으로 만드셨고, 거기에 그치지 않고 전승이 단절될 위기에 놓인 예술 종목들을 무형문화재에 등록과 능력을 갖춘 예능 보유자 인정에도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또한 ,차세대를 위해 음악 교사들을 위한 국악 강습, 민속 음악 교과서 편찬, 국악관현악단의 창설, 악기 개량 사업 등 선생의 국악에 대한 사랑과 열정은 전통 음악사에 수도 없고 한량이 없지만, 돌아가신 뒤에도 업적에 비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다가 2000년대 중반에 이르러 선생을 기리는 사업이 추진되고, 저서 ‘창악대강’을 통해 국악에 대한 열정과 혼을 후세에 남겼으며 평생을 국악진흥과 교육에 공헌한 것이 인정되어 서울특별시 문화상 수상, 국민훈장 동백장을 뒤늦게나마 수훈하였다.

2013년에는 고향인 산청군 이곳 상사마을에 생가를 복원하고‘기산 국악당’이 건립되면서‘기산 국악제전 및 전국 국악 경연대회’ 등 선생님을 추모하고 그의 정신을 잇고자 여러 행사를 추진하게 되었지만, 암흑 같던 시절 왜곡되던 국악을 지켜내려던 선생님의 고귀한 뜻을 품기에는 아직도 턱없이 부족함을 느낀다.

▲ 기산관 대청 전면에는 아리랑 가사가 편액되어 있다.
▲ 기산관 대청 전면에는 아리랑 가사가 편액되어 있다.

기산국악당

기산국악당은 국악 교육의 선각자셨던 박헌봉 선생의 생가에 만든 국악당이다. 그의 저서 ‘창악대강’을 통해 국악에 대한 열정과 혼을 후세에 남겼으며 평생을 국악진흥과 교육에 공헌하여 서울특별시 문화상 수상,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하셨던, 선생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뒤늦은 2013년 이곳에 생가를 복원하고, 기산관, 교육관, 전시관을 건립하여, 기산 국악당이라 이름지었다.

산청군에서는 ‘산청국악축제’라는 국악마당을 마련하여, 기산국악당에서 6월에서 11월까지 매주 토요일 오후 3시에 상설로 공연하며 선생의 뜻을 기리고 국악 진흥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 산청 남사마을에 있는 ‘기산 국악당’. 정면에 보이는 건물이 기산관이고 오른쪽이 기념관, 왼쪽이 전시관 건물이다. 기산관 앞쪽에 넓은 월대가 있어 공연장의 무대로 사용되고 있다.
▲ 산청 남사마을에 있는 ‘기산 국악당’. 정면에 보이는 건물이 기산관이고 오른쪽이 기념관, 왼쪽이 전시관 건물이다. 기산관 앞쪽에 넓은 월대가 있어 공연장의 무대로 사용되고 있다.
▲ 전시관
▲ 전시관
▲ 기념관
▲ 기념관

기산 국악당 대고각(大鼓閣)

기산 국악당 대고각은 정문과 기산 기념관 사이에 있는 누각인데, 이 누각에는 우리 민족의 평화와 염원을 기원하는 의미로 나라의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북인 ‘태평고’가 2020년 9월 올려졌다.

태평고는 울림판 지름 2m, 울림통 지름 3m, 무게가 500kg에 달하며 우리나라 최초로 북통을 줄로 엮어 오랫동안 대북소리를 보존할 수 있는 기법을 창안해 설계되었다고 하며, 특히 줄로 엮은 대북 가운데는 가장 큰 북이라고 한다.

▲ 줄로 엮은 대북 가운데 가장 큰 북이라는 태평고
▲ 줄로 엮은 대북 가운데 가장 큰 북이라는 태평고

태평고라는 이름은 가산 선생이 집필한 ‘창악대강’ 가운데 ‘지리산가’에 나오는 ‘사월의 북바위는 태평고를 울리느냐’에서 따왔다고 한다. 이 북은 나라의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소원성취 북이다. 태평고를 세 번 두드리고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 북을 제작한 ‘기산국악제전위원회’는 기산 국악당을 찾는 모든 사람에게 북을 두드리며 소원을 빌 수 있도록 배려한다고 한다. 따라서 남사마을 기산국악당을 방문한다면 이 북을 쳐볼 수 있다는 색다른 경험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대고각의 기문은 기산국악제전위원회 이사장인 최종실 선생이 썼다. 대고각에는 현대인들을 위해 한글로 쓴 현판이 여러 개가 걸려있다. 이것도 변화하고 있는 문화 중의 하나인데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굳이 이해하지 못하는 한자로 된 현판을 현시대가 만들어 가는 문화에는 더 이상 생명력이 잃어가고 있다는 반영일 것이다. 그러면 아름답게 변화하고 있는 현판문화를 이곳에서 살펴보자.

북소리

둥둥둥 북을 울려라

동트는 새벽녘 하늘 저 안개처럼

슬며시 내려와 온 세상에 포근히 울려 퍼져라.

둥둥둥 북을 울려라

잠든이 깨우는 한낮 저 태양처럼

모든 이 가슴에 일렁이는 햇살로 울려 퍼져라

둥둥둥 북을 울려라

한밤에 찬란한 저 별처럼

희로애락 인생사 신명나는 가락으로 울려 퍼져라

▲ 북소리 현판
▲ 북소리 현판
▲ 장사익의 ‘사월의 북바위는 태평고를 울리느냐’ 현판
▲ 장사익의 ‘사월의 북바위는 태평고를 울리느냐’ 현판
▲ 박헌봉의 지리산가 현판
▲ 박헌봉의 지리산가 현판

꼭 어려운 한자로 써야지만 품위 있고 권위 있는 문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새시대에 맞게 변화해 가는 모습이 아름답지 않은가? 이렇듯 우리 문화는 우리에게 어울리게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는 것이, 진정한 문화 사랑이 아닐까 생각한다.

대고각에서 내려와 기산관 뒤편으로 가면 대숲극장으로 오르는 오솔길이 나온다.

훤한 대낮에도 어두울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찬 대나무 숲속으로 들어가면 청량한 바람으로 코끝이 시릴 정도의 상쾌함을 느낄 수 있다. 홀로 오르는 적막함 속에 대나무 사이를 스쳐가는 바람 소리에 가슴이 열리는 느낌을 받는다. 돌아 오르는 대숲극장의 텅 빈 무대는 공연은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대금 소리 한 자락이 들려오는 듯하다.

▲ 대나무 숲속에 자리 잡은 대숲극장 무대
▲ 대나무 숲속에 자리 잡은 대숲극장 무대
▲ 극장 뒤로 조금만 오르면 박헌봉 선생의 국악에 대한 올곧은 기개와 같이 곧게 하늘을 향해 뻗어 올라간 소나무에게 ‘기산송’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 극장 뒤로 조금만 오르면 박헌봉 선생의 국악에 대한 올곧은 기개와 같이 곧게 하늘을 향해 뻗어 올라간 소나무에게 ‘기산송’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대숲극장에서 내려오는 길에 6월에서 11월까지 매주 토요일 오후 세 시에 있다는 산청국악축제에 내년에는 반드시 오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기산국악당에서 나와 사수천을 끼고 내려가다 보면 곧이어 이사재라는 송월당 박호원을 기리는 재실(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집)이 나오는데 이곳은 충무공 백의종군록에 기록이 나오는 역사적인 곳이기도 하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일본군의 모략과 선조 임금의 오해로 직책을 박탈당하고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우의정 정탁의 청원으로 정유년 1597년 4월1일 출옥하여 권율 장군의 휘하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을 받고 서울을 떠나 합천(율곡)으로 향한다. 정유년 6월 1일 억수처럼 내리는 빗속에서 청수역을 떠나 단성에 이르러 박호원의 농사를 짓는 이곳의 노비 집에서 하루를 묵었다.

이사재(尼泗齋)

대동여지도에도 나오는 이곳 지역의 산 이름 ‘니구산’은 공자가 태어난 지역의 산 이름이고 ‘사수’는 주자의 고향에 흐르는 강 이름이며 ‘이사재’는 각각 앞머리에서 따온 이름이다. 남사마을에는 성리학의 고장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유독 ‘니구산’과 ‘사수’의 이름을 따라 지은 건물이나 지명이 많다. 니구산과 사수천은 물론 사양정사, 이사재, 이동서당 등등.

▲ 산청 이사재(山淸 尼泗齋)
▲ 산청 이사재(山淸 尼泗齋)

장군은 이 지역의 유력한 집안인 박호원의 내력을 알고 이곳에서 유숙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밤새도록 내리는 빗속에서 방마저 좋지 않아 선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장군은 아침 일찍 삼가현을 향해 출발하였다. 이 기록은 난중일기에 나온다.

“정유년 1597년 6월 1일 경신 비가 계속 내렸다. 일찍 출발해 청수역 시냇가 정자에 도착해 말을 쉬게 했다. 저물녘에 단성과 진주 경계에 있는 박호원의 농노 집에 투숙했다. 주인이 반갑게 맞이했으나 잠자리가 좋지 못해 간신히 밤을 지냈다. 비는 밤새도록 멎지 않았다.”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길의 제1코스인 고난의 길은 도원수 권율 장군의 진영으로 가는 길과 칠천량해전에서 원균이 대패한 후 남해안의 정찰을 위해 떠났던 길이기도 했으며 장군은 옥고를 치른 아픈 몸과 어머님의 부음이 겹쳐 가누기 힘든 몸과 마음을 이끌고 비 내리는 긴 여정 중 산청군 단성면을 지났기에 고난의 길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박호원은 조선 전기 문신으로 세종 임금 때의 명재상인 황희 정승의 5대 손녀와 결혼한 박이의 아들로 본관은 밀양, 호는 송월당이다. 그는 1562년 명종 17년 토포사 종사관으로 임꺽정 등 도적을 진압한 공을 세우기도 했고 대사헌과 호조판서, 참판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사재는 박호원의 재실이고 현재는 그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 이사재로 들어가는 출입문인 거유문
▲ 이사재로 들어가는 출입문인 거유문

이사재는 남사천 건너편 북서쪽 언덕에 돌축대를 쌓고 지은 건물이다. 가파른 계단을 쌓아 3단을 만들어 시각적으로 위엄을 보이며 맨 윗단에 재실인 이사재를 두었다.

▲ 조선 말기 전통 가옥의 건축을 살펴볼 수 있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건물이다.
▲ 조선 말기 전통 가옥의 건축을 살펴볼 수 있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건물이다.

상량문에 따르면 산청 이사재는 철종 8년, 1857년에 건립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재실은 전후좌우로 반 칸을 툇간으로 한 앞면 4칸, 옆면 2칸 규모로 옆에서 보았을 때 5량가로 서까래만 쓴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한 칸의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온돌방을 1칸씩 두었으며 가장 바깥으로는 반 칸의 대청마루를 설치하였다. 마루에는 대청을 오르는 중앙 칸을 제외하고는 모두 계자난간을 설치했다. 온돌방의 앞뒤로는 좁고 긴 툇마루를 달아 대청과 온돌방을 마루가 감싸는 모습이다. 세 짝의 분합문과 창살의 조형미가 수려하고 조선 후기의 건축 특징이 적용되어 옆에 있는 연못과 잘 어울린다.

이사재 건물은 자리앉음새가 경사지를 깎아 단을 만들고 지은 건물이라 거유문을 통과해서 여유롭게 건물을 감상하기는 힘들지만 단정하고 안정된 팔작지붕에 계자난간을 두르고 처마끝을 들어 올리고 활주를 받친 조선 후기 가옥 건축을 잘 살펴볼 수 있는 건물이다.

마루에는 난간을 설치하여 정자처럼 구성하였으며 대청마루 앞에는 난간 없이 마루를 한 단 낮게 설치하여 출입을 편하게 하였다. 산청 이사재는 건물의 앞면과 뒷면에 길고 좁은 툇마루를 둔 점, 지붕 끝을 받치도록 활주(지붕 끝을 받치는 보조 기둥)를 설치한 점 등에서 조선 후기의 실용성을 강조한 건축 특징이 잘 남아있는 문화재이다.

▲ 처마 끝을 받치는 활주, 계자난간과 툇마루, 가운데 대청을 오르는 마루를 편이를 위해 한 칸 낮춘 모습을 볼 수 있다.
▲ 처마 끝을 받치는 활주, 계자난간과 툇마루, 가운데 대청을 오르는 마루를 편이를 위해 한 칸 낮춘 모습을 볼 수 있다.
▲ 이사재는 남사마을 건너편 높은 곳에 있어 대청마루에서 내려다보면 남사마을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 있다.
▲ 이사재는 남사마을 건너편 높은 곳에 있어 대청마루에서 내려다보면 남사마을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 있다.

앞서 말했듯이 이곳에는 연리지인 배롱나무와 매화를 심어놓았고 잘 만들어진 방형의 인공 연못이 있다.

▲ 이사재 오른쪽 툇마루에서 본 배롱나무와 방형의 연못
▲ 이사재 오른쪽 툇마루에서 본 배롱나무와 방형의 연못

다음으로는 이사재에서 나와 사수천변을 따라 내려가는 길은 예담길이라 하여 걷기에도 좋고 역사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아름다운 길이다. 한국 근대사의 정취를 맡으면서 사계절 어느 때나 특색있는 길을 걸어볼 만하니 남사마을 답사에는 1~2시간 걷는 일에 할애하고 떠나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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