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분회 정원기 회원



2023년 8월 6일, 올 휴가 마지막 날이다. 10대 후반 화가 지망생으로 꿈꿔왔던 대전 맥화실 은사님과 동기들의 얼굴을 보며 지난날의 회포를 풀 겸 계획된 날이 오늘이다.

칠전 홍성으로 장소 변경과 맘 편히 약주 한잔하려면 대중교통을 권하던 장 화백의 제안도 멀리하고 자가용을 선택했다. 휴가철 막바지 행락객으로 서해안 고속도로는 부분마다 꼬리의 정체는 이어졌지만, 짜증보단 일상의 굴레에서 벗어나 그리운 사람들을 만난다는 기대감으로 작은 행복의 설렘을 맛보는 듯하다.

장 화백의 선광미술학원 방문과 점심 후 충청인의 자랑이며 홍성을 대표하는 고암 이응노 화백의 생가 기념관을 들러본다는 기대감이 부풀어 올라 그런지 몰라도 약속 시간보다 30분 일찍 도착했다. 예술가의 인생은 힘들고 고달프다 했는가? 하나 장 화백의 활동이 지금껏 이어지는 건, 자가 건물의 작업실과 헌신적인 남편의 배려가 아닌가 싶다. 화실 내부에서 풍겨 나오는 향기와 직감으로 말이다.

정성껏 준비한 점심과 한잔 술의 반주가 끝난 오후 3시, 현지인 장 화백의 인솔과 내비게이션의 도움으로 2011년 11월에 개관했다는 이응노 기념관에 도착.

한국건축대상 수상작으로 바로크 미술을 연상하듯 기념관은 진한 흙색의 고딕 건물, 주위로 멀리 용봉산과 월산을 뒤로하고, 주위로 펼쳐진 지형 그대로 이어지는 잔디밭, 연꽃이 가득한 연못과 새로 복원된 고암의 생가 초가집이 위치에 있다. 실개천 돌다리를 건너갈 땐 수국의 진한 향기가 우리를 반겨주는 듯했다.

숨이 헉헉 막히던 짧은 시간을 뒤로하고 전시실 안의 시원함과 쾌적함이 순간 천국에 온 기분이다.

검은색의 노출된 낮은 천장, 시멘트 느낌의 벽면, 마치 형무소를 연상케 하는데 이응노 화백의 질곡된 삶을 표현하지 않았나 싶다.



이응노 화백의 일대기와 그때의 자그마한 뉴스거리는 복사된 신문이 잘 스크랩돼 보관되어 있었다. 그의 일대기는 조원재 선생님의 방구석 미술관으로 이미 습득되어 작품 하나하나에 집중해 보기로 했다.

1924년 영친왕의 스승이기도 한 해강 김규진의 제자로 제3회 조선미전에 입선한 「청죽」이나 1931년 특선으로 입상한 거작 3m의 「풍죽」, 실제 대나무숲에서 물 한 바가지 마실 정도의 청량감까지 느껴지는 작품, 1982년 광주 사태에서 영감을 얻은 5.5m의 거작 「군상」은 훗날 대전 미술관에서 대신 하기로 했다. 1970년대 거대한 비석을 보는듯한 「문자추상」 군상 시리즈는 가까이 다가가 실물을 보는 것만으로도 조금이나마 허기진 내 마음의 갈증을 해소 해주는 듯했다. 조금의 아쉬움이 있다면 작품 하나하나의 설명이 필요한 도슨트의 도움이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이다. 이응노 화백의 제자인지는 몰라도 타인의 작품이 전시된 배경과 설명의 아쉬움이다.

백남준보다 더 빠른 월드 아티스트! 서화로 시작해 백남순, 나혜석, 정규익의 도움을 받으며 카멜레온처럼 변신한 고암. 사생을 바탕으로 인상주의 모네의 15세기 원근법을 동양화의 기반으로 서양화 기법을 접목시킨 「황량」, 1960년 4.19혁명으로 돈줄이 막혀 프랑스 유학 때 신문 폐지를 이용한 콜라주, 1967년 동백림사건으로 3년간 옥살이 때 밥알과 종이 찰흙 합판에 목재와 고추장을 이용한 군상 시리즈.

1977년 지금은 유야무야된 백건우ㆍ윤정희 납치사건에 연루된 불운의 예술가. 1983년 프랑스로 귀화한 그를 보며 이념으로 갈라진 그 시대에 고국을 밟지 못하고 1989년에 생을 마감한 그를 보면서, 미술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과의 호흡이라고 결론내리고 싶다.

이응노 기념관을 뒤로하고 어느 유행가요의 수덕사의 여승의 주인공 김원주, 춘원 이광수가 그의 아름다운 문체에 반해 필명으로 ‘나뭇잎 하나’라고 지어준 일엽스님, 한 많은 서양화가 나혜석, 일엽의 외아들 일당스님 김태신의 만남의 장소로 유명한 숭덕산 수덕여관으로 향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공사 중인지 개관하지 않은 선미술관을 뒤로하고 1967년 동백림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잠시 머물러 생활할 때 바위에 2점의 문자적 추상화로 남긴 입각화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의 쉼 없는 예술가의 자질과 정신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입각화를 뒤로 하고 오른쪽 측면을 살피니 우물터가 보이고, 마당으로 나와 보니 거목의 소나무가 시원스레 키 자랑을 하며 앞마당을 지켜 주고 있었다.

7년이란 긴 세월을 땅속에 있다가 짝짓기를 위해 보름 정도밖에 살지 못하는 매미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오늘, 아이러니하게도 100여 년 남짓 격동기를 살아온 불운한 예술가의 생애와 흡사한 점을 발견하면서 산 아래 커피숍에서 아직 퇴직 후 가족을 위해 생업전선에 있는 김동옥 샘, 여전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장정숙 화백, 시어머니 모시고 가정에 충실한 박범란 샘에게 오늘의 고마움을 표하며 이응노 생가 탐방기를 마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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