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순임 공보이사

치과의사보다 의사 친구가 많은 필자는 치과계 못지않게 의과계 소식을 접할 기회가 자주 있다. 근래에는 우리에게도 골이식술용 차폐막 이름으로 친숙한 고어사(社)의 제품 공급 거부 사태가 뉴스피드에 올라와 유심히 지켜보게 되었다.

희귀질환을 가진 심장기형 소아환자들의 수술에 꼭 필요한 제품인 인공혈관을 공급하는 고어사는 지난 2017년 9월 한국 시장에서 철수하며 인공혈관 공급을 중단했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공급 재개를 요청했지만, 인공혈관은 한국 내 대체품이 존재하므로 공급이 불필요하다는 회신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대한흉부외과학회에 따르면 소아심장수술(폰탄수술)에 쓰이는 인공혈관은 고어사 제품 외에 대체품이 없는 유일한 재료라고 한다.

미국 의료기기업체 고어가 인조혈관 사업부를 철수하면서 내건 이유는 바로 “손실 누적”이었다. 미국과 중국에서 각각 80만 원, 140만 원대를 호가하는 인조혈관 제품이 한국에서는 40만 원대밖에 안 되어 손해를 보고 있다는 게 고어 측 주장이었다. 2017년 당시에는 소아심장수술용 인공혈관 공급 중단은 가까스로 면했지만, 당시 성인용 인조혈관 공급은 중단해 현재도 물량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이후 소아심장수술용 인공혈관 공급마저 중단되자, 관련 학회 및 환우회에서 지속적으로 공급 부족 문제 해결을 요구해 왔다. 모 환자단체는 고어사의 공급 중단에 대해 “반인권적이고 비윤리적 행위”라며 강력하게 규탄하고 나섰다. 이와 더불어 정부에는 유사 사례를 막기 위해 “대체제가 없으면서 생명과 직결되는 필수 치료재료를 공급 독점하는 제조사가 공급 거부나 중단의 방법으로 환자의 접근권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제도적·입법적 대안도 마련해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외국계 독점 기업이 공급 중단이라는 극단적인 영업 결정을 내린 것은 고어만이 아니다. 작년 4월, 대표적인 간암치료제 리피오돌을 독점 공급하는 프랑스 제약사 게르베가 다른 나라와 유사한 평균 약가로의 500% 인상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한국 시장에서 철수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국내 간암 환자의 절반 이상이 리피오돌을 사용하고 있어 정부가 가격 협상에 나섰지만, 과도한 인상은 어렵다는 입장이어서 국내 간암 환자 절반 이상이 치료를 받지 못하는 처지에 내몰릴 상황이었다. 결국 작년 9월 리피오돌은 1회분 5만 원에서 19만 원으로 수가가 인상되었고 공급이 재개되었다.

항생제 댑손(한센병/혈관염/피부염), 프로게스테론 주사제(자궁출혈/무월경), 에스트로겐 주사제(중증 자궁출혈), 알보칠 질정(자궁경부염) 등 약값이 너무 싸서 책정된 가격으로는 원가 보전이 불가능하여 제약사가 생산과 공급을 포기하는 사례가 잇따라 나타남에 따라, 유용하게 사용하던 환자들만 난처하게 되는 경우를 국내에서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댑손은 한센병(나병) 치료에 쓰이는 일종의 항생제로서, 혈관염이나 면역세포 관련 질환 등에도 약효가 있는데, 지난해 초 국내 생산과 공급이 중단됐다. 중단 이유는 약값이 22원 정도로 너무 저렴하게 책정되어 원료를 공급해 왔던 인도 회사가 원료 제조를 중단하고, 다른 회사 원료는 너무 비싸 생산 원가를 도저히 맞출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댑손은 한센병(나병) 치료에 필수 약물이고 국내 한센병 환자 300여 명은 질병관리본부로부터 무상으로 댑손을 공급받아 복용하지만, 올해 복용분만 최종적으로 공급되고 멈춘 상태다. 당국은 “국가필수의약품이나 신약 등에 대한 보험급여는 환자들의 수요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으나, 건강보험을 투입해야 한다는 점에서 ‘합리적’ 가격책정에 대한 많은 고민을 검토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다국적 제약사의 독점공급 의약품·치료재료는 독과점공급으로 인한 횡포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인공혈관처럼 한국 공급가격이 지나치게 낮은 경우, 투자 비용을 회수해야 하는 제약사에 일방적 희생을 요구할 수도 없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의약품 독점 공급업체와 보건복지부의 약가 협상이 장기화하면 할수록 불편함과 난처함에 내몰리는 것은 환자들이다. 다국적 제약사 입장에서야 다른 국외시장도 있는데 한국에서만 낮은 약가로 판매하는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고, 업체가 철수하면 한국 환자들에게 피해가 돌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살펴보자면, 그동안 다른 나라에 비해 손해를 감수하고 제품을 팔아온 기업이 과연 ‘비윤리적’이라고 비난받아 마땅한가 하는 조심스러운 의문이 든다. 여기서 ‘윤리’란 무엇일까? 언제나처럼 정부가 고민한다는 그 합리적 가격책정에서 ‘합리’는 궁극적으로 누구를 위한 기준일까? 제품을 생산하는 회사가 이윤을 남겨 기업을 유지 발전시키고 소속 종업원의 생계를 유지하는 것은 ‘윤리’가 아닌가? 그들이 주장하는 합당한 약가를 정당하게 지불하고 절실히 필요한 환자에게 공급을 원활하게 하는 것은 ‘합리적’ 판단의 범위에 포함될 수는 없는 일인가? 수입단가가 얼마든 전국의 병원에 일일이 공급하기 위해, 각종 인허가의 행정비용과 임금 및 재고관리, 임대료 등등의 영업 비용을 들여 세금까지 내는 상황이라면, 재화를 공급하는 기업과 개인이 과연 어느 정도의 이윤을 남기는 것이 ‘윤리’적이고 ‘합리’적인가? 물론 이에 대한 기준은 각각의 입장에 따라 생각이 다를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의료시장에 만연한 특유의 ‘공급가격 후려치기’가 전 지구상의 의료 공급자에게 어떠한 저항도 없이 일괄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보편타당한 ‘합리적인 윤리’인지에 대한 깊은 의문도 든다.

“모든 일에는 흑백을 가릴 수 없는 측면이 있기 마련이라, 100%의 악도, 100%의 정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할 말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자기성찰과 상상력임에 분명하다고 저는 믿습니다.” 필자가 좋아하는 일본 작가 오쿠다 히데오가 본인의 어느 소설 서문에 쓴 글이다. 각자의 ‘정의’와 각자의 ‘윤리’와 각자의 ‘합당한 이치’라는 것이, 각자가 겪어온 경험치와 그에 따른 추론 그리고 그 확장된 상상력이 미치는 범위에 따라 서로 다른 바에야, 각자의 할 말이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급기야 소아용 인공혈관 수급을 위해 정부 당국이 미국 고어사 본사를 방문한다고 한다. 국내 소아심장병 환자들이 겪고 있는 상황과 치료재료 가격제도 개선 등을 설명하고, 한국 내 공급을 적극 요청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와 동시에 보건복지부는 WHO에서 다국적 제약사의 약가 횡포에 대한 국제적 공조를 공식적으로 건의, 오는 5월 WHO 총회에서 논의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내 생업과는 관계없지만 동일한 의료제도 하에서 일하는 직업군의 이야기와 생각은 경청하게 된다. 그 무엇보다도 조속히 사태가 해결되어 심장병으로 고통받는 소아환자들이 원활한 시술을 받을 수 있기를 고대한다.

저작권자 © 덴티스트 - DENTIST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