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만 더 속도를 내면 앞지를 수 있을 것 같은데도 남자는 신중하다. 트랙 밖에서 그를 바라보던 남자 역시 기다리라고 혼잣말을 내뱉는다. 이윽고 그들은 때가 왔음을 동시에 직감한다. 핸들을 쥔 남자는 엑셀을 밟아 순식간에 선두를 차지한다.

영화 <포드 V 페라리>는 1966년, 세계 최고의 모터스포츠 대회 ‘르망 24시 레이스’에 출전한 두 남자의 실화를 다룬 작품이다. 이들에게 레이싱은 인생이나 마찬가지다. 캐롤 셸비(맷 데이몬)는 심장질환 때문에 트랙 밖으로 물러났으나 레이싱에 대한 애정만은 한결같다. 켄 마일스(크리스찬 베일)는 뛰어난 카레이서지만, 가장으로서 레이싱에만 몰두할 수 없는 현실 때문에 자동차 정비공으로 일한다. 그러던 그들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온다. 매출 감소로 위기를 겪고 있던 포드 사가 페라리 사를 인수ㆍ합병하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 페라리의 수장으로부터 모욕까지 당한 헨리 포드 2세는, 6년 연속 르망 24시 레이스 우승을 놓치지 않던 페라리를 이기고자 대회 출전을 선언한다. 포드 사 간부들은 최고의 팀을 만들기 위해 튜닝 전문가인 셸비에게 대회에서 이길만한 자동차를 만들어 줄 것을 제안하고, 셸비는 마일스에게 자신을 도와 대회에 출전해달라고 부탁한다.

제임스 맨골드 감독은 우승을 위해 하나로 뭉친 두 남자의 우정을 속도감 넘치는 레이싱 장면과 함께 그리고 있다. 그는 전작 <3:10 투 유마>나 <앙코르>에서도 남성 간의 연대를 서사에 녹여내 대중과 평단의 지지를 얻으며 독보적인 연출력을 인정받은 바 있다. <포드 V 페라리>도 맨골드 감독 특유의 우직한 분위기가 빛을 발한다. 자칫 포드와 페라리의 대결이나 레이싱 대회 같은 볼거리에만 치우칠 수 있었던 서사의 균형을 잃지 않아, 120분을 훌쩍 넘는 러닝타임을 체감하기 어렵다.

셸비는 마일스와 함께 우승도 가능하게 할 만한 자동차를 완성하지만, 포드 사의 간부들은 까칠하고 타협할 줄 모르는 마일스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 마일스의 질주를 막는 건 경쟁팀의 레이서도, 자동차도 아닌 포드 사 간부들의 ‘욕심’이다. 이들은 ‘포드’라는 이름을 돋보이게 하려고 조작도 서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장애물을 끊임없이 넘어서는 셸비와 마일스의 도전 정신은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다.

마일스가 고대하던 르망 24시 레이스는 관객의 몰입도를 최고조로 이끈다. 이 대회는 한 팀에서 3명의 레이서가 24시간 동안 교대로 13,629km 서킷을 돌며 선두를 차지해야 하는 ‘죽음의 레이스’다. 아이러니하게도 영화는 이 대회에서 기다림의 미학을 강조한다. 차량이 곳곳에서 충돌하고 파편이 날아오는 중에도 마일스는 페라리의 레이싱카를 추월하기 위해 ‘때’를 기다린다. 마일스가 아들에게 말했던 “차와 한 몸이 되는, 속도도 기어 변속도 완벽한” 그 순간을. 내달리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 삶과도 일맥상통한다.

제작진은 르망 24시 레이스의 현장감이 그대로 전해지도록 CG를 최대한 배제했다. 배우들이 실제 트랙에서 레이싱카를 직접 운전하게 했으며, 자동차에 카메라를 장착해 마치 주인공과 한 차에 탄 듯한 생생한 장면을 완성했다.

군더더기 없는 전개와 속도감 넘치는 레이싱 장면 말고도 영화의 완성도를 높인 건 배우들의 연기다. 영화의 흥미를 더하는 포드맨들의 알력 다툼은 뛰어난 조연 배우들이 있어 가능했다. 레이싱 팀에서 마일스를 배제하려는 부회장 리오 비비 역의 조쉬 루카스는 관객의 분노를 자아낼 정도로 얍삽하고 교활한 면모를 훌륭하게 연기한다. 미드 <워킹데드>에서부터 범상치 않은 연기력을 자랑했던 존 번탈은 셸비와 마일스의 능력을 높이 사는 마케팅팀장 리 아이아코카 역으로 두각을 나타낸다.

영화에서 무엇보다도 빛나는 건 단연 크리스찬 베일이다. <파이터>, <바이스>에서처럼 실존 인물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인물로 완벽하게 다시 태어나는 그에게 한계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이는 영화 속에서 자신의 신기록마저 갈아치우는 마일스와 닮았다. 영화 말미, 마일스가 서서히 속도를 줄이며 짓는 의미심장한 표정은 그 어떤 대사보다도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12월 4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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