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자 : 빅토르 위고
역 자 : 정기수
출판사 : 민음사
출판일 : 2012년 11월

어릴 때 추억을 떠올려 보면 넉넉하진 않은 형편에서도 부모님께서는 애들 먹을거리에는 조금도 아끼지 않았고 아울러 마음의 양식이 됐던 어린이 문학 전집도 한 질 장만해 주셨다. 그 <딱따구리 그레이트 북스>에 포함돼 있던 축약판 [장 발장]을 수십 번 읽고 또 읽으면서도 매번 눈물을 흘렸던 것을 보며 스스로 원래 눈물이 많은 성격임을 알고 있었기에, 워낙에 감정표현 메마른 경상도 사나이들도 나이 들면 여려진다고들 하길래 본인처럼 눈물 많은 전라도 사람은 이제 불혹도 넘겼으니 좀 마초적으로 변할 줄 알았는데... 영화 [레미제라블]을 개봉관에서 보고 나서야 다소 변하긴 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냥 눈물 뚝뚝도 아니고 아예 어깨 들썩이며 끝날 때까지 오열하는 쪽으로...

영화 자막도 올라가고 있는 중인데 극장 측에선 중년 남성 관객에 대한 배려도 전혀 없이 불부터 훤하게 켠걸 보면 극장 사장은 영화도 미리 안 봤나 싶었다. 그러고 보니 또 생각난다. 그 유명했던 뮤지컬도 결혼 전 지금 아내인 당시 여자 친구와 보려고 예매 했었는데, 부모님이 연락도 없이 갑자기 상경하셔서 역시 <눈물>을 머금고 부모님께 효도 관람 시켜 드렸었다. 이번에 큰 맘 먹고 완역본을 읽을 때도 여러 번 울컥하는 심경을 금할 수 없었다. 여성 호르몬 부쩍 늘어난 나이 탓도 있겠지만 그래도 영화 볼 때 제일 많이 울었는데, <영화>배우들이 직접 부르고 녹음한 목소리가 분명히 가수만 못했을지언정 감동으로 흐르는 눈물의 농도까지 옅어지지는 않았던 것은 워낙 감성 자극하는 뛰어난 노래들과 함께 위고 작가님의 원작이 내포하고 있는 거대한 감동 에너지 덕택이었을 것이다.

많은 버전이 존재하는 이 작품의 200여 년 역사 속에서, 최근에야 대한민국에서 성사된 500페이지 짜리 두툼한 서적 다섯 권으로 구성된 완역본 레 미제라블의 출간을 통해, 마흔 넘어서는 잘 시도하지 못했던 도전이라는 것을 기꺼이 시도하고 기쁘게 체험할 수 있었던 점이 뿌듯하고 감사하다. 원작을 읽고 나니, 이런저런 정보를 토대로 갖게 됐던 등장인물 이미지에 선입견이 있었음을 알게 됐다.

팡틴은 성녀는 아니고 갓 스물에 싱글맘이 된 철없는 소녀에 가까웠고, 코제트도 천사는 아니고 백치미에 가까워 보였으며, 마리우스는 민주투사가 아니고 첫사랑에 눈뜬 풋내기 소년이었다. 그렇다 해도 우리가 상실한 젊음을 소유하고 있기에 그들이 보인 유아적한 조급함을 예쁘게 봐줄 수 있었다. 한편, 축약판에서는 많이 생략됐다가 복원된 인물도 있는데, 미리엘 주교와 하층계급의 악당 테나르디에 부부의 딸과 아들인 에포닌와 가브로슈가 그들이다.

완역판 레 미제라블은 장 발장에게 은촛대를 선사한 미리엘 주교의 긴 에피소드로 시작한다. 말하자면 그는 살아있는 성령이자 작가의 대변인으로서, 신의 대리인인 사제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그리고 보통 인간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자기희생으로 넓은 주교관을 병원으로 내주고, 궁핍한 이웃 구제에 헌신하며 사제에게 내려진 특권을 모두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데에 바쳤다. 그 무욕의 경지에서, 프랑스 대혁명의 주체 세력 중 한 사람인 G 의원의 죽음 직전에 그와 대면하게 되는데, 주교께서 인간적으로 꺼렸던 살육의 실체라 할 의원의 임종을 위한 힘든 만남에서 뜨거운 논쟁이 펼쳐진다. 임사체험에 가까웠을 그 경험 전에도 완벽해 보였던 주교님은 그 신과 니체의 대결 같았던 대토론 이후 핍박받는 사람들에게 신자 여부에 관계없는 애정과 우애를 더욱 발휘했고 그러던 중 운명적으로 장 발장을 만나게 된다.

가브로슈도 빼놓을 수 없다. 아이는 부모 특히 어머니를 많이 닮는 법인데, 말 안 듣고 고집 센 우리 집 아이들을 보면 정말 그런 것 같다. 테나르디에 부부, 악의 두 축이라 할 만한 그들이 거리로 내몬 아들이 바로 가브로슈이며 영화에서 혁명 중에 시민 편에 서서 활약을 펼치다 슬프게 죽고 마는 그 아이가 바로 가브로슈이다. 그런데 하류 악당인 부모의 품인 악의 구렁텅이에서 버려짐으로서 가난과 궁핍속의 부랑자의 삶을 살긴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이 아이에게 자유와 선의지를 일깨워 준 아이러니가 원작에서는 표출되고 있으며 거리의 아이다운 낙천적인 유머가 독자에게 오히려 슬픔으로 다가오게 하며, 영화와 마찬가지의 대활약이 등장한다. 썩은 사회에 던지는 가브로슈의 작고 유쾌한 복수는 짜라투스트라의 한 마디를 어렴풋이 떠오르게 한다. “해를 입으면 작은 복수라도 하는 것이 낫다. 나를 위해서도 적을 위해서도. 아무 복수 없이 상대를 용서 하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물론 마지막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을 빗댄 것이겠다. 신이 된 인간은 위대하지만 평범한 우리는 위대한 신이 아닌 부족하기 짝이 없는 미저러블한 사람들로서 인간성 회복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비극의 완성을 위해 작가께서는 다시 어린아이가 된 자만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그리스도 말씀을 애통한 방식으로 뒤틀어 자유로운 부랑아 가브로슈를 필연적인 죽음으로 몰아가는 사이, 누나인 에포닌은 미드와 함께 드라마계의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는 대한민국 막장 드라마에서 빠질 수 없는 삼각관계의 미워할 수 없는 악역으로서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다른 여자와의 사랑을 이어주는 가슴 아픈 활약을 펼치며, 그이가 슬퍼할까 봐 도적들이 코제트네 집을 털으려는 것도 목숨 걸고 막아낸다. 마리우스와 함께 죽고 싶은 욕망을 품고 남장하여 시민군에 뛰어들었지만 그가 총에 맞을 위기에 처했을 때 대신 총상을 입고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의 애절함만으로도 한편의 영화가 탄생할 수 있을 듯하다.

클라이막스에 이르러 육식동물 같던 자베르가 깊이 고뇌하는 것은 법질서가 완벽하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 없어져서인데, 그가 불완전한 인간 위에 군림하는 완벽한 법의 수호자임을 확신할 때에는 모든 것이 명징했고 그의 의식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지만 범죄자에 의한 구원과 상호 용서 뒤 모든 것이 흐려진 그의 카오스 상태를 퇴보라고 말할 수는 없겠다. 진화는 확신과 완벽의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혼돈의 과정일 것이다. 나무가 하늘까지 닿기 위해서는 그 뿌리가 지옥에 까지 미쳐야 한다고 외친 이도 니체였던가?

해피엔딩이면서도 슬픈 결말에서 장 발장은 마땅히 누려야 할 행복을 아주 짧은 순간만 맛보고 숨을 거두었지만, 주교의 은촛대 가르침 이후 그 말씀이 마법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휘재의 [인생극장]같은 선택 상황에서 단 한 번도 사적인 이익을 위해 조금만 묵인해도 됐을 양심을 저버리지 않았고 그 대가로 겪을 고통을 감내했으며 죽음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은 점에서 위대한 인간임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돌이켜 보면 이 작품을 접하고 늘 났던 눈물은 주인공이 겪는 무서운 고난 때문이 아니라 장 발장이 사랑했던 딸 코제트를 잃었다고 느끼며 삶의 의지를 상실하고 죽음을 재촉할 때 그 가족 이산이 피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임을 알게 됐기 때문이었으리라.

죽음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그 숙명 앞에서 아무 생각 없이 확신해 왔던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주장에 대해 회의감이 든다. 영장류 중에서도 우두머리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질 자신도 없어진다. 인류 대다수에 속하는 평범한 사람들은 행복을 선택하려면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에서 [영장]아닌 [만물]에 방점을 둬야 할 듯하다. 영장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힘들어 할 것 없이 그저 만물의 일부일 뿐임을 인정할 때 그 솔직함이 불행의 늪으로부터 구원에 이르게 할 것 같다. 물론 극소수의 선구자들이 선의로 남겨두었을 발자취는 시간 남을 때 찾아보고 쉬엄쉬엄 따라가 보는 것도 [만물]에서 [영장]으로의 가교 역할을 할 것이다. 이 위대한 작품의 거대한 존재감은 그 선구적 발자취의 명백한 증거이다!!!

경기도치과의사회 김기리다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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