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당시 치과의원 (이해박는집)
1926년 당시 치과의원 (이해박는집)


경기도치과의사회가 운영해 온 치과박물관은 2000년 1월에 개관하였고 2004년 3월 치의학 역사관의 이름으로 개관식을 거쳐 지난 20여 년간 치과계의 지나온 역사를 정리하여 보존 및 조명하고 발전적인 미래를 위하여 유지되었습니다. 누적 관람 인원은 그리 많지 않았으나 상징적인 존재로서 그 의미가 부여되어 왔고 지난 2020년 3월 대의원 총회에서 최종적으로 폐관이 결정되었습니다.

물건들이 정리되기 전에 전시되었던 물품 리스트를 들여다보며 그 시절 치과에서는 이런 기구와 재료들을 쓰고 진료를 하였겠구나 하고 가만히 상상해보니, 과거의 시간 속으로 잠시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도 듭니다. 이에 역사박물관 폐관에 즈음하여 2002년도에 발간된 [경기도치과의사회사]라는 800여 쪽에 달하는 두꺼운 책을 참고로 하여 지나간 치과 선배들의 자취를 잠시 돌아보는 짧은 글을 써보고자 합니다.

20년의 세월을 간직한 이 오래된 책을 펼치자, 지나간 시간의 근엄함이 떠오를 듯한 묵직하고 점잖은 곰팡내가 아닌 꼬릿한 치즈향 비슷한 냄새가 나서 한 번 웃게 됩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자극이 후각을 통해 마주치게 되어서가 그 이유입니다. 그나저나 선배들께서 이 책을 만드실 즘 그 누가 20년 후에 경기도 모처에서 개원한 제가 이 글들을 읽을 것이라 상상하셨을까요. 이런저런 쓸데없는 생각까지 골똘히 해보고 있자니 시간여행이 주는 우연한 만남과 시공간을 초월한 대화가 참 흥미롭습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사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쌍방의 대화라기보다는 일방적인 서술을 집중해서 듣는 경청에 가깝습니다.

혼자서는 선뜻 들기도 힘든 무게가 주는 존재감은 차제 하더라도 [이해박는집] 사진으로 시작한 이 백서는 그야말로 경기도 치과의사회가 지나온 자취에 대한 기록의 대장정입니다. [경기도치과의사회사]라 하여 경기도 지역에 한 해 서술된 글인가 싶었더니, 뜻밖에도 첫 100여 페이지까지는, 멀리는 삼국시대 이사금에서부터 구한말 그리고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전후까지 치의학의 역사 전체를 장엄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의방유취, 동의보감 등 학창시절에 들었던 단어도 보여 그 익숙함에 반갑기도 하거니와, 조선 시대 임금들의 치통과 그에 대한 처방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 서양의학의 발전 및 청나라를 통한 의학서적의 수입으로 시작된 서양의학의 도입 역사는 글을 읽어갈수록 흥미롭습니다. 이에 간단히 시대별로 우리나라 치의학 및 치과의사의 역사를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삼국시대와 고려 그리고 조선 시대 : 전통의학과 근대치의학의 태동

예나 지금이나 치아에 관한 관심은 오복의 하나로 무병장수의 필수적 조건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치아에 대한 이 시기의 기록으로 흥미로운 것은 치아가 많은 것을 덕이 많은 것으로 여겨 존경했다는 사실인데, 이는 삼국유사의 유리왕 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신라 3대 임금인 유리 이사금에 대한 기록에서는 임금의 칭호인 이사금이 이즐금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알려주고 있습니다.

“처음에 왕이 그의 매부인 탈해에게 왕위를 양보할 때에 탈해가 말하길 무릇 덕이 있는 사람은 이가 많은 법이니 마땅히 잇금으로 시험을 해보자 하여 떡을 물어 시험해 보니 왕의 이가 많았음으로 먼저 즉위하였다. 이 때문에 이즐금이라 하니, 이즐금이란 칭호는 이 임금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한 나라의 대표인 왕을 뽑는 기준이 치아의 개수였다니, 지금 시절에 생각하면 다소 오컬트적인 방법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만 이유야 어찌 되었건 우리 선조들이 치아 건강을 사람됨의 근거로 보았다는 점이 현대의 치과의사로서는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현존하는 한국 최고의 의서인 고려 시대 [향약구급방]에는 당시의 치과용 서역 산 약재가 기재되어 있고 치과 질환의 총수를 19종, 치과 관계 처방 수를 34개, 치통은 4개로 분류하였고 치료 처방으로는 12개를 수록하였습니다. 우와의 충전은 가공한 송지(turpentine)를 사용하였고, 양치질의 목적 중 하나는 동요되는 치아의 고정이라고 서술되어 있습니다.

고려 시대의 구체적이고 독자적인 의학의 육성은 이후 조선의 성립으로 더욱 발전하게 되었는데, 전통의학이 곧 한의학으로서 중국 의학이라는 의미를 과감하게 벗어버리고 중국의학과 다른 독자적인 영역이라는 강력한 자의식의 발동이 있었으며, 이는 곧 동의보감의 예처럼 ‘동의학’이라는 단어의 탄생으로 귀결되었습니다. 치과 분야의 수술은 아마도 침술에 의한 마취법과 간단한 기구로 시술했던 것으로 보이며, 또한 이 시기 [향약집성방] [의방유취] [동의보감] 등 의약서가 편집되어 많은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특히 [동의보감]에서는 치통은 7종으로 분류하였고 충치 발생의 원인을 구강이 불결하여 부패한 기와 벌레가 작용하는 결과로서, 충치는 전염성이 있으며 그 치료는 살충으로써 비로소 가능함을 기재하고 있습니다.

현재 치의학 역사관에 전시되어 있는 물품 (좌 : 교합기 / 우 : 발치겸자 등 외과 기구)
현재 치의학 역사관에 전시되어 있는 물품 (좌 : 교합기 / 우 : 발치겸자 등 외과 기구)


익히 아시는 바와 같이 조선 시대 의학 관련 분야는 다른 실용학문과 더불어 천시되었으며 따라서 의학의 전반적인 발전과 사회적 지위는 저하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17세기에 접어들면서 전 세계적인 소빙하기로 인한 자연재해와 전염병의 만연은 새로운 의술과 의학에 대한 강한 욕구를 낳게 되었습니다. 이에 서구의 발전된 과학기술에 관한 관심과 이해가 높아지면서 점차 실학자들에 의해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수용되기 시작하였고, 그 가운데 서양의학은 서구의 강력한 군대와 상인 그리고 선교사에 의한 서세동점의 시기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한편 조선 시대의 임금들의 치통과 관련하여 나타난 기록들은 사뭇 흥미롭습니다. 아마도 사극을 통해 자주 접해 온 역사의 주인공들이고 현대 바로 이전의 역사이어서 더욱 그럴 것입니다. 조선의 임금으로 치통을 앓았다는 최초의 기록은 성종 때이며, 이 시기 ‘장덕’이라는 제주 의녀는 치통을 잘 고치는 의원으로 이름이 높았다고 전해집니다. 조선 시대 가장 심한 치아질환을 앓았던 임금은 중종이었습니다. 중종은 치통으로 신하들을 인견하지 못하고 정무를 멈출 정도로 심하였으며 며칠을 치통으로 고통받아 얼굴과 뺨이 온통 부어오를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음을 실록은 매일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광해군 또한 당시 어의였던 허준으로부터 치통과 관련하여 잇따라 침을 맞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허준의 [동의보감]에 따르면 치의학 영역의 질환 수는 대략 64종이고 처방 수는 280가지로 분류되어 있으며, 치통의 원인은 여러 부위의 열이 모여들어 생긴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치료방법도 단순한 병증에 대한 치료가 아니라 종합적인 조제가 필요함을 서술하고 있는데, 이는 서양의학의 대증법적 치료와는 다른 전통적인 인식체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동의학적 의학 전통은 서양의학적 지식의 전파로 인해 해체되어 갔으며, 고종과 순종의 치과 치료는 외국인이 맡게 되었고 순종의 치아치료를 담당한 일본인 치과의사에게 그 공로로 금시계를 하사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조선 시대 임금들은 치통으로 고생한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전통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치아를 잘 닦은 까닭에 충치가 적었다는 사실과 부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생활이 중류 이하인 사림들이라도 식후에는 반드시 물을 입안에 넣고 헹구는 함수습관이 있었습니다. 또 오랜 기간 소금을 이용하여 잇솔질을 하였기 때문에 충치가 적고 치통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는 현대의 섭생과 현저히 다른 식생활 환경에 기인하기도 하거니와, 예를 들자면 설탕과 같은 가공류 음식의 섭취가 없고 정제되지 아니한 거친 음식의 구강 내 자정작용 등이 그러할 것입니다. 실제로 뉴스에서 가끔 발견되는 조선 시대 미이라들의 사진을 접할 때, 제3대구치까지 치아의 손실이 거의 없는 몇몇을 상기해보면 이러한 추측이 가능해 보입니다.

이후 청나라를 통한 의학서적의 수입과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까지 선교의료인들에 의해 광범위한 지역에서 의료활동이 전개되었습니다. 이후 일본을 통한 서양의학의 수용과 그에 따른 치과의학의 보급이 이루어졌습니다.


구한말 그리고 일제강점기 : 근대치의학의 수용

서양의 치의학 역사에서 치과의사의 기원은 이발사라고 배운 기억이 납니다만 구한말의 치아치료를 대부분을 담당한 사람들은 이발사와는 상관없어 보입니다. 이들을 ‘입치사‘라고 하였고 그들 중 ’잇방‘이라 불리운 영업소를 개설하는 사람도 등장하게 되었는데, 1900년 초부터 1910년까지 각 처의 입치사는 치과의사 수의 몇 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조선인 최초로 잇방을 개설한 사람은 최승용으로 한성 종로에서 ’치과전문‘이라는 간판을 걸고 서양치과의술에 의한 시술소를 개설했습니다. 이후 일정한 장소를 가지고 잇방을 개설한 사람들은 ‘치과전문’ 혹은 ‘이해박는 집’이라는 간판을 걸었습니다.

한국인 최초로 정규 치의학 교육을 받은 사람은 함석태이고 1912년 일본치과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1910년도에는 2명에 불과하던 조선인 치과의사들은 점차 늘어나 1920년에는 일본인을 포함하여 조선에 있는 전체 치과의사 수가 100명을 넘어서게 됩니다. 치과의사 과잉의 역사는 그 태동부터 이미 시작된 것이 아닌가 싶어 조금 놀랍기도 합니다.

현재 치의학 역사관에 전시되어 있는 물품 (좌, 우 : 1920~30년대부터 사용된 보존 치료제)
현재 치의학 역사관에 전시되어 있는 물품 (좌, 우 : 1920~30년대부터 사용된 보존 치료제)
현재 치의학 역사관에 전시되어 있는 물품 (좌 : 간이 수동식 저울 / 우 : 원심주조기로 추정)
현재 치의학 역사관에 전시되어 있는 물품 (좌 : 간이 수동식 저울 / 우 : 원심주조기로 추정)


이 시기에 조선치과의사 시험제도가 최초로 시행되었는데 1922년 봄에 시행된 경성치과의학교 입학시험에서는 최초로 50명이 선발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시작된 경성치과의학교는 처음에는 야간수업으로 2년제 남녀 공학이었으며, 입학자격은 일본인은 중학교 졸업 이상 조선인은 보통학교 졸업자에 한했다고 합니다. 지금과는 현저히 다른 자격 조건이라 격세지감이라는 말로도 다 표현하지 못할 차이라 하겠습니다.

최초의 치과의사회 조직은 1921년 창립된 조선치과의사회와 조선연합치과의사회 그리고 이후 연계된 한성치과의사회 등이 있었으나 이는 일본인들의 주도로 활동한 조직이었다고 합니다. 실질적으로 한국인들이 조직한 경기도치과의사회는 1946년 경성치전을 졸업한 제1대 문기옥 회장과 이창용 안병식 부회장이 임원으로 활동하며 시작되었습니다.


해방과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의료환경의 변화

정치적 격변과 함께 해방 이후 눈여겨볼 가장 큰 행정적 변화는 1946년 9월 18일 서울시가 경기도에서 분리 독립하여 서울특별시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의료계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던 일본인들이 빠져나간 후 한국의료계는 사실상 공백 상태와 진배없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미 군정 기간을 통해서도 온전히 복원되지 못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보건후생부와 노동부를 폐지하여 사회부로 통합하여 보건 후생노동부인과 관련한 행정을 같이 관장하게 되었습니다. 보건의료 행정이 사회부 내의 보건국으로 위상이 약화되었던 것입니다. 보건국 아래 보건과, 의무과, 약무과, 방역과, 한방과, 간호사업과 등 6개 과로 조직되었으며 이때까지도 독립적인 분과로 치과 행정을 시행하지는 못했습니다.

이러한 국가 재정의 어려움과 정치 행정적 의식 부족으로 명맥만 이어가던 중,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보건의료사업은 심각한 타격을 맞게 되었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의료인력과 장비의 부족이었고 이러한 문제해결에는 막대한 경비가 필수적이었지만 전쟁의 발발로 의료환경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게 됩니다. 의료재정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공공의료 비중은 지극히 적었고 민간 의료진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특히 각종 전염병에 대한 대책이 시급한 과제였습니다.

그러한 중에도 1946년 3월 10일 경기도치과의사회가 조직 및 설립되기에 이릅니다. 안종서, 박명진, 김연권, 조명호, 문기옥, 안병식 등 발기인 10인으로 이루어진 경기도치과의사회 결성준비위원회는 조명호의 자택에서 개최하였으며, 이후 경성치과전문학교 회의실에서 거행된 창립총회에서 문기옥(경성치과의학교 2기/ 석천치과의원 원장)을 만장일치로 의장으로 추대하여 진행되었습니다. 경기도치과의사회 결성과정은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조선치계사]라는 잡지사 기자 3명이 참석하였다고 하며 당시에도 치과전문지 형태의 언론이 존재했었다는 점에서 무척 인상적입니다.

1949년 8월 수원시로 승격되기 전인 수원 읍에는 6명의 치과의사가 근무하였고, 경기도 지역의 치과의사 등록 수는 한국전쟁 와중인 1951년 최초로 1백 명을 넘어섰고 한국전쟁 직전까지 여자치과의사는 4명이었으나 전쟁 후 1952년에는 1명으로 줄어 더 늘지 않았다고 합니다.

책장을 넘기며 중간중간 첨부된 사진들을 유심히 살펴보니 한국전쟁의 고난을 겪은 그 시절에도 우리의 선배님들은 믿기 어려울 만큼 의연한 모습으로 진료실에서의 일상적 업무를 수행하셨고, 지금 시절에 보기에는 다소 과하게 포마드를 바른 듯한 단정한 머리 스타일과 간혹 보이는 단아한 양복에 나비넥타이의 차림으로 고난의 시절을 치과의사로서 품위 있게 유지해오고 계셨습니다. 읽어 나갈수록 [경기도치과의사회사]는 근현대를 아우르는 우리나라 치의학사의 거대한 기록이며 어느 곳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높은 수준으로 치의학 역사를 심도 있게 저술하고 있습니다. 현재 경기도치과의사회 사무국에 3권이 소장용으로 보관되어 있으니 기회가 되신다면 대여하여 한 번 읽어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저작권자 © 덴티스트 - DENTIST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