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시대 1960년대 : 의료계의 변화와 치의학의 발전

전후복구와 더불어 정치적 혼란이 겹쳐졌던 1960년대에는 1952년에 제정되었던 [국민의료법]을 전면 폐기하고 1962년 새 의료법이 제정 공포되었습니다. 이 법령에 따라 의사들의 정기 신고가 시군구 의사회를 통해 전국에서 일제히 시행되어 회원들의 실태가 처음으로 파악되었습니다. 그 전까지 30%로 부진했던 회비 납부율도 거의 100%를 달성하였는데, 당시 경기도 전체 19개 시군에 총 338명의 의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전 인구의 72%가 농어촌에 상주하는 반면 의료업 종사자의 75%가 도시에 집중된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정부는 무의면 해소에 적극적인 대응을 보였으며 의료동원이라는 방식으로 시도립병원 보건소 및 무의면에 소요되는 의료인력을 확보배정하였고 이에 의료계는 동원의에 대한 처우 개선과 복무단축을 촉구하였고 그 후에는 동원령 해제를 꾸준히 요구하였습니다.

이 시기 의사 보수교육을 의무화시켰으며 보건의료기구의 일원화를 추구하는 한편, 최초로 의사면허세를 부과하였습니다. 다소 강제적 형태로 시작된 것이기는 하지만 1960년대부터 의사회 조직은 체계적으로 정비되고 정기적으로 총회가 이루어지는 등 틀이 잡히게 되었습니다. 무의촌 해소에 많은 지원을 하였으나, 1960년대 무치의군은 무려 40군데에 이르고 있어 여러 방안 중 치과이동진료차는 가장 현실적인 적절한 조치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전체 치과이동진료차 10대 중 경기도에는 1대가 배속되었고 당시 경기도청 소재지인 수원에 배치되었습니다. 치과이동진료차 1대가 1주일의 4일동안 동원되어 도내 1개 면에 하루씩 간다고 해도 8개월에 한 번 정도 같은 면을 들리게 되는 사정이라, 이동차가 한 번 찾아가면 환자가 장사진을 이루었고 날이 저물도록 환자를 보고도 남는 환자들은 아우성을 칠 수밖에 없는 참담한 상황이었습니다. 더불어 이러한 의료 사각지대에서 무면허 의사의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습니다.

1960년대에 치의학교육에서 유일하게 치과의사를 배출하던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의 교육 연한이 4년에서 치의예과 2년이 늘어난 6년제로 바뀌게 되었으며 1967년 경희대에 치과대학이 신설되면서 치의학계 지형의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치과의사 수는 점차 증가하고 있었으나 전체 인구증가율에 비하면 그리 나아진 상황이 아니었고 전국적으로 서울과 경북전북을 제외한 나머지 각도의 치과의사 수는 감소하기도 하였습니다. 경기도 22개 시군의 경우에도 인천과 수원을 비롯한 도시에 집중된 현상을 보이며 1970년대 초반까지 무치의군이 존재했으며 이를 전국적으로 보면 치과의사 전 회원의 54%가 서울에 몰려있는 등 도시지역 집중현상으로 도농간 현저한 불균형을 초래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 가장 무서운 질병 중 하나로 결핵을 꼽을 수 있으며 초등학교 신체검사 결과 가장 많은 질병으로는 눈병이고 다음으로는 충치가 꼽혔는데, 수치상으로 평균 어린이 3명 가운데 1개가 되는 셈이었습니다.

경기도치과의사회는 1966년부터 교의수당을 받아 경기도치과의사회관 설립기금으로 적립하고 있었습니다. 회원을 위한 보수교육을 시행하였고 도치과의사회 산하 각 분회는 매달 정기적인 친목 모임을 통해 조직의 활성화를 기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인천에 도치과의사회가 있던 상황에서 1967년 경기도청이 수원으로 이전하였으므로, 가급적 빠른 시기에 수원으로 경기도치과의사회를 이전하는 문제를 고민하였으나 상당한 기간 대부분의 회무가 인천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조금 재미있는 기록으로 인천 소재 한 치과의원에 1968년 7월 50대 중반의 남성이 환자를 가장하고 들어와 근무 중인 간호원을 취직시켜준다며 금은방으로 유인, 금품을 갈취한 사기 사건이 있었다고 하는데, 예나 지금이나 치과 종사자의 이직 성향 또한 그 유래가 오래된 것이 아닌가 하는 시답지 않은 생각도 잠시 해 봅니다.

현재 치의학 역사관에 전시되어 있는 물품 (좌 : 아말감 믹서기 / 우 : 캐비트론 스케일러)
현재 치의학 역사관에 전시되어 있는 물품 (좌 : 아말감 믹서기 / 우 : 캐비트론 스케일러)

치의학의 발전과 1970년대 : 국민의료보험의 시대의 개막

치과의원 수는 1970년 95개소에서 1979년에는 140개소로 늘어났지만, 연평균 몇 개소 정도로 증가하고 있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즉 이 시기에 치과의사들의 공급이 그리 원활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며, 이에 턱없이 부족한 치과의사 공급을 보충하기 위해 실시된 대책으로 ‘한지치과의사제도’가 있었습니다.

70년대의 1.2차 오일쇼크로 인해 순조롭게 성장하던 우리나라가 경제가 최초로 큰 타격을 입었으나 치과병원들이 숫자상으로 그리 큰 영향을 받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오일쇼크로 인한 재료가격 인상과 각종 치과재료 및 약품 그리고 기자재의 수입금지 조치로 인하여 치과재료 유통의 난맥상까지 겹쳐 개업가가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인천과 같은 대도시에서조차 거의 그 영향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사안입니다.

1977년 7월 1일을 기해 국민의료보험이 출범하게 되었고 이러한 제도의 시행은 사회보장제도의 기초가 된다는 사실을 고려하여, 의료계는 적극적인 자세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당시 보사부가 제정한 진료수가로는 양질의 진료를 베풀 수 없다고 지적하고 있으며 치과계 역시 불합리한 책정에 대해 치협에서 수차례 초진재진료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이의 시정을 건의하였습니다. 적정한 의료수가 체계의 항구적인 정착은 현재까지도 이루어지지 않은 한국 의료계의 오래된 염원과 정당한 요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문제점 이외에도 의료보험 해당 환자들이 일반의원급 기관에는 가지 않고 종합병원에 몰리는 종합병원 집중화 현상이 나타났는데 그 수가 전체 보험환자의 약 80%에 달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보험조합의 요양취급기관의 지정제에서 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산적한 의료보험제도의 개선을 위해 서구 복지국가에서 시행되고 있었던 보험관리공단으로 의료보험 관련 기관을 통합하여 국가적 차원에서 의료보험제도를 일원화하여 관리하는 것이 요구되었습니다. 당시 치무행정 또한 열악한 환경이었으며 행정과 제도의 변천을 거듭하였으나 결국 독립적인 행정체제를 가지지 못한 채, 의정3과로 축소되어 옮겨져 간호업무 및 한방업무와 함께 통합된 채로 80년대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중에도 치협에서는 치과의료봉사를 전국적으로 실시하기로 확정하고 각 시도지부에 전달하였으며, 이에 경기도치과의사회의 주도로 경기도 각 시군구 내에서 일제히 무료진료와 무료구강검사 및 건치 아동 선발과 같은 행사가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회원 과대광고 문제가 논란이 되자 그에 대한 근절 노력이 이루어져 치협 광고통제규정을 발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지금의 시절에도 의료광고에 대한 민감한 사안이 끊임없이 논의되고 있는데, 그 유래를 여기서 짐작하게 됩니다.

1978년 수원시치과의사회 소속이 회원 상호 간 친목을 도모하고 의원 복리를 증진하며 기금관리 운영을 명확하고 철저히 하는데 그 목적을 가지고 수원시치과의사회 공제회(수치공제회)를 설립하였습니다. 이후 성남 안양 부천 등 다른 분회에도 영향을 끼쳤고 90년대에 이르러서 [경기치과의사신협]의 탄생에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1978년 11월에는 서울 용산에 있는 하얏트호텔에서 건국 30주년 기념 종합학술대회가 개최되었습니다.

현재 치의학 역사관에 전시되어 있는 물품 (좌 : 소독기 / 우 : 파일 세척기)
현재 치의학 역사관에 전시되어 있는 물품 (좌 : 소독기 / 우 : 파일 세척기)
현재 치의학 역사관에 전시되어 있는 물품 (좌 : 필름 확대경 / 우 : 저울)
현재 치의학 역사관에 전시되어 있는 물품 (좌 : 필름 확대경 / 우 : 저울)

비약적인 성장의 1980년대 : 전 국민 의료보험시대

1989년 전 국민 의료보험이 시행되었으며 당시 전국의 근로자와 의료보험조합 가입자만을 대상으로 실시되었던 의료보험제도는, 농어촌을 대상으로 한 지역의료 보험으로 확장되고 나아가 도시지역 의료보험을 실시하면서 명실공히 국민 보험제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의료보험 확대 시행 그 자체에만 치중한 나머지 보완정책이 소홀하여 국민과 의료계 모두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80년대에는 도내 치과의사 수로 보나 경기도치과의사회로 보나 도내 치과계가 급속도로 발전한 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화염병과 수류탄이 난무하는 어지러운 시기였으나 70년대 말에 완성된 경인공업 지역이 본격적으로 가동하고 수출이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시기였으며 이러한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을 유치하여 성공적으로 개최하였습니다. 사회의 절대적인 부가 성장함에 따라 치과계도 양적으로 현저히 발전하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구의 수도권 집중화 현상 즉 이촌향도 현상은 60년대부터 시작된 것인데, 70년대를 거치며 서울을 포화시키고 80년대에 이르러서는 서울과 지리적으로 근접한 경기도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것입니다. 이에 따라 의료서비스의 소비자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더해 치과교육이 본격적으로 안정화됨에 따라 새로운 치과의사들의 공급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1980년에서 1989년 사이 10년 동안 한 번에 적게는 76명에서 많게는 154명까지 합계 1042명으로, 한 해 평균 100여 명의 젊은 치과의사들을 배출했습니다. 서울대뿐 아니라 70년대부터 졸업생을 배출한 경희대 연세대를 필두로 이후 조선대, 경북대, 전북대, 단국대, 전남대, 원광대, 부산대 등 후발주자들도 치의학도의 양성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각 대학의 이러한 노력으로 자격을 갖춘 새로운 치과의사들이 순조롭게 공급되었고 그리하여 86년부터는 무치의촌을 위한 한지치과의사제도가 폐지되기에 이릅니다.

1983년부터 만 7년간의 노력 끝에 경기도치과의사회관이 건립되었으며 이는 경기도치과의사회가 안정적으로 발전하는데 가장 큰 기반이라고 평가할 수 있으며, 80년대의 가장 큰 사업목표이자 결과가 되었습니다. 1985년 5월 수원시 송죽동 253번지 소재 121평을 구입하면서 시작된 회관건립은 추진과정에서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1989년 6월 1일 전 도회원들의 염원을 담아 경기도치과의사회 회관의 문이 열리게 되었으며, 이는 90년대 경기도치과의사회의 비약적 발전을 위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전남대학교 치과대학 치의학 역사관에 전시되어 있는 모형을 바탕으로 경기도치과의사회에서 직접 제작한 치과용 목재의자. 1850년대 영국산(실제작 : 2002년 10월)

이상으로 고대에서 근대 및 현대를 거친 우리나라 치과의사와 치의학의 역사에 대해 간략히 정리해 보았습니다. 아래의 사진들은 1910년대에서 1970년까지 실제로 사용되었던 치과 물품들과 그에 대한 간략한 설명으로써, 역사관에 소장되었던 기증품 중 현재 남아있는 몇 가지를 사진으로나마 간단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현재 폐관 전 역사관에 남아있는 물품은 350여 점으로 191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의 치과 관련 물품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시된 자료 중에는 1930년대에 제작된 유닛 체어, 한국에서 제작된 틀니 압축기, 미국에서 제작된 스케일링 기구, 무봉관 제작기계 및 기공용 치과 전기 엔진, 롤러 등이 있습니다. 치과 역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늘 보게 되는 제법 유명한 사진의 [이해박는 집]에서 사용한 기구들이 실제로 이런 모습이었다고 생각하니, 시간의 흐름을 단박에 뛰어넘어 지금 이 순간 이들을 보고있는 제게는 그저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이 외 1940년대에 사용되었던 치과용 엑스레이 촬영장비, 치과용 캐비닛, 1950년대에 사용되었던 치과 보철용 약제품 및 보철용 소형 기구와 각종 치과의료기구 등 이 밖에도 20세기의 치과 의료의 자취를 추측해 볼 수 있는 자료들이 있었습니다. 물품들에 묻은 세월의 흔적에서는 지나온 과거의 희생과 노력이 오롯이 새겨져 있는 것 같아 숙연한 마음마저 듭니다.

회무를 하다 보면 여러 가지 다양한 사업계획을 하기 마련인데, 어떤 사업은 오랫동안 유지되어 조직의 상징적인 행사가 되기도 하고 어떤 기안은 논의단계에서 취소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안건은 열띤 토론과 논쟁 후에 사업시행이 결정되어 힘겹게 유지되다가 결국 폐지가 결정되는 사업들도 있습니다. 개관에서 폐관까지 그 임무를 성실하게 마치고 그야말로 ‘역사’ 속으로 사라질 치의학 역사관의 모습을 지난 시절 이 땅의 치과 역사에 관한 거대한 기록과 함께 잠시 복기해 보았습니다.

어떤 일에는 우연히 그 일을 하게 되는 아주 특별한 계기가 존재하는 일도 있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그 존재 자체도 전혀 모르고 있던 곳이었지만, 폐관이 결정되고 나서야 작은 기록들을 참고하여 지난 몇 주간 치의학 역사관 물건을 뒤져보는 일이 또한 제게는 그랬습니다.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작용이며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합니다.

같이 읽어가는 현장감을 조금이라도 더해보고자, 본 글은 이야기를 나누는 듯한 친근한 문체로 서술해 보려 노력하였습니다. 대화 중 진실로 우연한 시기에 이 책의 존재를 알려 준 동료 이사님 그리고 역사관과 관련해 여러 자료를 전달하여 주고 물품 정리와 촬영을 도와준 경기도치과의사회 사무국 직원들에게 작은 감사의 말씀 덧붙입니다.

저작권자 © 덴티스트 - DENTIST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